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주인공.
하마르티아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나도 들어본 적 있는데...
이런 감독의 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는 말이 더 믿을만하지 않을까!
그래! <시학>을 읽어야 해!
* 아래 글에는 여기 두 책을 참고하였습니다.
루퍼트 우드핀 저 <아리스토텔레스> 김영사. 아리스토텔레스 저 <시학>중 옮긴이 천병희의 글 인용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지적인 사람으로 평가된다.
우리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저작의 3분의 1만 전해진다. 그 분량은 30권 정도로 요즘 페이지로 환산하며 2000페이지 정도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그의 책들은 저서라기보다는 강의노트이다.
강의를 위한 보조 자료로서 완전하지 않은 비공개적인(esoeric 또는 강의 용의 acroatic) 문서라는 말이다. 그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원고에 농담과 문학적 수사들을 더해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책을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전제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부터 오류다.
나도 강의노트에
"주인공 없는 영화=0000"
이라고 써놓았는데 실제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영화에 주인공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두 명일수 있다는 착각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한 메모일 뿐이다.
게다가 일 부분이 화재로 소실되어 그나마도 우리가 보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시학> 1449b21을 보면 희극에 관하여 다음에 논하자는 말이 나오는데 이후 희극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정치학> 1341b 38을 보면 ‘카타르시스’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시학>을 참조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실제 <시학>에서는 이 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만나는 그의 저서들은 의미가 통하지 않으며 전후가 맞지 않는 데가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시학詩學peri poietikes>이다.
그러니 <시학>을 재미있게 읽기 힘든 것은 우리 탓이 아니다.
과연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시학>이라는 책을 썼을까?
사실 학자들이 찾은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영화감독다운 상상력을 곁들이자면
플라톤을 부정하고 싶었던 탓이지 않을까 싶다.
플라톤은 예술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가 말하는 이상국가에서 예술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했다. 플라톤은 예술을 무용한 것으로 위험한 환상이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20년간 아카데이마에서 수학했지만 후계자로 지목받지 못하자 리케이온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자신만의 철학들을 가르쳤다.
그곳에서 시학을 가르쳤던 것이다. 플라톤이 말한 무용한 예술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도 시학은 그런 차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장 흥미로운 영역이자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낸 학문일 것이다. 스승 플라톤이라는 체를 거쳐 성장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가르침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역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시학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과 무관하게 읽을 만한 가치가 차고 넘치는 책이다.
하물며 작가들에게는 어떠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이 가장 좋은 스토리라고 헸다.(여기서의 비극은 슬픈 이야기, 세트엔딩과는 다르다)
스토리가 비극적이려면 당연히 인물들이 비극적이어야 하고
그 비극적인 인물은 아래와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 도덕적으로 무결해야 한다.
2. 적합해야 한다.
3. 실제 인간성과 같아야 한다.
4. 일관된 성격을 가져야 한다.
역시 <시학>은 작가들의 필독서가 맞나 싶다.
그런데 인물의 4가지 특징들을 설명하며 적은 부연을 보면 이 말들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도덕적으로 무결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인물은 좋은 성격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도덕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은 성격이 좋다고 전제한다.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며 노예는 아주 못 돼먹은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가끔 좋은 여자, 좋은 노예가 있을 수도 있다'
라고 했다.
인물이 적합해야 한다는 것은
'여자를 남자처럼 용맹스럽든가 지력을 쓰는 사람으로 그려내는 것은 적합지 않다'고 적는다.
아르스토텔레스가 <킬빌> 같은 영화를 봤다면 혀를 찼을까?
<마녀> 같은 영화는 아마 스토리라고 쳐주지도 않았을지 모르겠다.
이제 여성은 더 이상 남성보다 약하거나 우둔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노예 계층의 도발은 분노대신 쾌감을 안겨준다.
그런데 이런 고리타분한 꼰대양반을 봤나! 이런대도 우리는 <시학>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감히 단언컨대 지금 이제 막 시작하려는 작가들에게 작법서를 이제 그만 좀 내려놓으라고 하고 싶다.
<시학>도 다르지 않다.
나는 여기서 수천 년 전 할아버지 말씀에 딴지를 걸고 싶은 게 아니다.
그렇다고 수천 년 전 말씀이니 그러려니 하자고 덮어두자는 것도 아니다.
최초의 작법서라 불리는 <시학>를 필두로 초보작가들에게 작법서가 정말 필요한지, 그걸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정말 안타깝게 초보인 당신에게 <시학>이 아직인 이유는 이런 구시대적 가르침 때문이 아니다.
당신에게 이 책은 정말 너무너무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화법의 문제가 아니다.
어휘가 어려워서도 아니다.
지금은 아무리 읽어봤자 해독이 불가능하다.
당신의 배움이 적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경험이 적어서다.
이야기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게도 배워서 쓰는 것이 아니다.
쓰다 보면 배워지고 써봐야 배울 수 있는 상태가 되어간다.
그런데 막상 써보기 전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작법의 길은 난해하기만 하다.
어렵다고 느껴지다 모르겠는 지경이 극에 달하면 문득 이게 벌써 몇 천년 전 이야기이냐! 지금의 이야기와 어떻게 같을 수 있냐! 며 부정하는 단계에 이른다.
차라리 그런 부정은 건강하다.
대부분은 동료들에게 <시학>만큼 이야기의 원형을 다룬 책이 또 없다며 다 이해한 척 허언을 날리고 집에 와서는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한다. 그리고 결국, 작가가 내 길이 아니라는 의심의 경지까지 성실히 우울에 빠진다.
작법서도 같다.
앞서 구조를 잊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말했듯이 작법서는 작가에게 스토리를 수학처럼 이해시키려고 하고 수학처럼 이해하지 못한 작가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한다.
한 글자도 안 쓰면 작가 아닌 거다.
작법서는 작가에게 최고의 빌런인셈이다.
<시학>을 즐기지 못하는 자신을 너무 한심해하지 말자.
아직은 때가 아닌 것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