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다 보면 언제나 좋은 결과물만 얻는 것은 아닙니다.
종종 망치는 날이 있기도 하죠.
선이 삐뚤뺴뚤해서 창문이 일그러지게 그려지는 날도 있고,
원하는대로 조색이 되지 않아 물을 많이 넣고 끓인 라면처럼 밍숭맹숭한 날도 있으며,
붓칠을 하면 할 수록 색이 둔탁해지는 날도 있고
스케치북에 듬성듬성 물 때가 생기는 날도 있지요.
그림이 이상한 건 제 마음이 큰 몫을 하는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 말도 안되는 민원을 받고 감정 쓰레기통이 된 하루,
그림은 그리고 싶은 데 머릿속에 잡념과 상념이 그득한 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불안에 떠는 날,
마음이 쓸데없이 조급한 날….
제 마음이 요동치는 그런 날에 그린 그림은 확실히 실망하게 됩니다.
망친 그림을 보고 속상해하고, 복잡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한 번 더 좌절하게 되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림을 망치는 날은 내가 지금 무언가 불안, 초조, 괴로움, 고민들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알려주는 신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만족스런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면
왜 내 마음이 불안한지, 내가 요즘 힘든 일은 무엇인지, 어떤 일에 스트레스와 압박을 받고 있는지...
심해 속의 나와 조우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깨닫게 된 것들은 그림 뒷 장에 적어 두곤 하죠.
이제 그림을 망치는 날은
우울감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이 아닌
무의식 속 깊은 나와 진심으로 마주하는 순간으로 바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