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언제나 평온해야 한다.
연출: 폴 버호벤
출연: 이자벨 위페르
폴 버호벤이 이 영화로 뒤틀린 인간의 욕망을 한 여성을 중심으로 표현하고자 했을 때 12주에 걸친 촬영기간 동안 그는 그녀에게 단 하나의 디렉션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주인공인 '미셸'은 폴 버호벤이 형상을 빚고, 이자벨 위페르가 숨결을 불어넣은 여인인 셈이다.
첫장면부터 사실 충격적인데 그 구도가 너무 아름답고 장면이 고요하여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꼈다. 길고 가는 거실창과 짙은 색의 차분한 마룻바닥, 깨어진 유리잔들조차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정작 그 놀라움의 당사자인 미셸은 너무도 차분하여 옷을 추스르고 깨진 것들을 치우고 욕조에 몸을 담그며 시간을 흘러보낸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 약하거나 너무 강해서도 아닌 그저 누구도 믿지 못해서이다. 순간순간 그 사고가 그녀를 덮치고 그녀는 고양이 마티에게만 서운한 소리를 할뿐이다.
눈알은 뽑지 못하더라도 할퀴어 줄 수는 있잖아.
그녀는 가장 가까운 친구인 안나에게도 자신이 받은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가 감정을 드러낼 때는 주로 악한 장난을 치거나 악한 의도를 갖고 상대를 대할 때뿐이다. 패트릭에게 아빠와의 그 날을 이야기할 때 그녀는 꽤 즐거웠다는 듯이 이야기하는데 그 날 이후로 그녀는 평생 자신의 감정을 누르고 살아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셸의 모든 관계는 다 조금씩 어긋나있다. 아들인 뱅상에게 미셸은 결코 모든 걸 감싸주는 따뜻한 엄마가 아니다. 친구인 안나의 남편 로버트와는 불륜관계이고, 어머니의 젊은 남자친구는 아예 존재자체를 무시해버린다. 회사에서도 그녀는 다소 독단적인 보스이다. 신선한 것은 그녀의 태도이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관계들이 애초에 비뚤어져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의 탓으로도 돌리지 않는다. 어두운 과거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거짓말들이 계속되어 생겨난 뒤틀림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녀는 뒤틀림을 즐기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하며 바로잡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부분에서는 인정하기도 한다. 그 과정이 너무나 무미건조하게 정말 미셸이 처음 사고를 당했을 때와 비슷한 톤으로 흘러간다.
미셸은 안나에게 "수치심은 뭔가를 못하게 막을 만큼 강한 감정은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 말은 그녀의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철학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까지 살아온 것처럼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스스로 해결한다. 그 모든 것들이 시종일관 같은 톤으로 진행되면서도 긴장감이 있으면서도 절대 흔해빠지지 않아서 좋았다.
+미셸의 전남편인 리처드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음을 알고 그녀에 관해 물어보는 장면이 꽤흥미롭다. 당신이 차라리 가슴크고 젊은 여자에게 반했다면 그러려니 하겠다면서 "당신책을 읽은 여자라니. 당신은 실망하게 될거야. "
아. 여자의 질투는 정말 다각적이고 복합적이다. 어쩌면 이리도 닮아있는지.
+그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그녀에 대한 존중이 없다. 안나의 남편 로버트가 가장 대표적이다. 강간을 당하고 난 후 그 사실을 말했음에도 "당신이 시든 꽃이어도 날 만져줄 수는 있잖아."란다. 미친.
모두가 그렇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셸에게서 비단 경찰이나 기자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불신이 느껴지는 것은 이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자벨 위페르는 멋지고 사랑스럽다. 약간은 바랜 느낌의 그녀는 반쯤 감긴 눈으로 사물을 응시한다. 그 모습이 어쩐지 투명하여 공기중에 흩어질 것 같다. 유난히 가는 몸을 부각시키는 코트와 드레스들 때문에 그녀는 정말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단단하게 그녀를 받치고 있는 힐마저 없었다면 아마 공중에 떠있는 착각마저 들었을 것이다.
얇고 가는 입술을 조금 내밀고 뭔가를 바라볼 때 그녀는 아무말없이도 주위 분위기를 '이자벨 위페르'로 만든다. 메릴 스트립과는 다르다. 메릴 스트립은 늘 다른 메릴이지만 이자벨 위페르는 늘 그녀다. 그점이 너무 환상적이다. 그래서 그녀가 나오는 모든 영화는 언제나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