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와 도마씨
때때로 우리는 침묵하고 있는 편이 더 나을 뻔했다든지, 사람들과 함께 있지 말 걸 하고 후회하곤 한다. 우리는 으레 상처를 입고서야 침묵의 상태로 돌아가면서, 왜 그렇게 이야기하길 좋아할까? 우리는 또한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들에 관해, 특히 싫어하는 것들에 관해서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즐긴다 43. 1권 10장
토마스가 우리 시대에 살았다면 며칠도 '이 세상'에서 며칠 못 버티고 곧장 수도원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이 수많은 말들을 감당하지 못해서 말이다. 말말말. 말들이 난무하다. 토마스는 쓸데없이 말 많은 것은 딱 질색한 듯하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들이나 말이 많다고.
우리는 종종 말로 실수를 하고 부끄러워진다. 타인의 말에 상처받아 "다시는 내가 너랑 상종하나 봐라" 자신을 고립시키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금세 기회가 오면 말이 쏟아놓고 실수를 반복한다. 많은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토마스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말할 때가 많다. '나는 이것이 좋고 이것을 하고 싶어'라고 보다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 출근하고 싶지 않은 직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무엇을 하고 싶어' 말하는 순간 우리는 해야 하는 책임을 갖게 된다.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살짝 나빠지게 되니까.
나는 물에서 자유롭고 싶어.
그럼 수영을 배워.
그래서 하기 싫은 일에 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되나 보다. 말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험담하는 것도 비슷하다.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고 흠모하기보다는 흠짓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한다. 타인의 강점이 나의 약점으로 비교되어 나 자신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험담은 사실 당사자뿐만 아니라 (험담은 주로 뒷담화 형태로 이루어지니까) 그 험담을 '들어주는' 혹은 듣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듣게 되는' 사람들에게도 위해적이다.
왜 사소한 험담에 그리 낙심하느냐? 설사 더 심한 말을 들을지라도 흔들리지 말지어다. 지금은 그 말을 그저 흘려들어라. 그리고 앞으로 네 삶이 많이 남았으니 분명히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다.
3부 57장
역시 토마스답게 단순하고 명료한 충고이다. 중요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은 말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말이다. 특히 험담만큼 쓸데없는 말이 없다. 타인을 비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말을 경청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만일 우리가 듣는 모든 말을 마음속에 챙긴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마음이 아무리 크거나 단단하다 해도 애초에 그렇게 많은 거친 말들을 쌓아 둘 수 있을 만큼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토마스처럼 - 적어도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상에 의하면- 진중하고 심각한 분이 '지금은 그 말을 그저 흘려들어라'라고 조언하는 것이 조금 어색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귀결시키는 기도 하라고 하거나 말씀을 읽어라 혹은 더 심하게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점검해 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번 경우 그의 말이 다르다.
우리가 듣는 말들은 우리가 관심을 주는 만큼 무게가 나가고 크기가 커진다. 문제는 우리가 경청해야 할 말은 흘려듣고 흘려 들어야 할 말에는 오히려 지나친 관심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도마씨는 억울할 것이다.
"내가 관심을 주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요. 나도 그냥 흘려보내고 싶어요.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계속 그 말이 떠오르는데 어떻게 해요. 생각할 때마다 그 한 마디가 내 마음의 방을 가득 채워서 다른 말은 들어올 공간조차 없어요. 머릿속이 너무 시끄러워요. 저는 정말 조용하고 살고 싶어요"
도마씨는 누가 봐도 내향적이고 얌전한 사람이다. 목소리는 작고 몸의 움직임도 조용하다. 휴지 한 장을 뽑아 눈물을 닦는 일조차 조심스럽다. 그는 직장에서 목소리 큰 동료들이 하는 말에 상처받는다. 누구도 도마씨가 그들의 말을 그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모를 것이다. 그들에게는 농담이지만 도마씨에게는 험담이다. 꼭 도마씨에게 하는 말이 아닐지라도 거칠고 큰 언어들은 도마씨의 뇌리에 남아 혼자 있는 시간까지 방해한다. 낮에 들었던 말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 잇기를 하고 때때로는 과거 사람들과 연결되어 한참 동안 그 생각에 빠져 있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한참 동안 인생불평만 혼자서 떠들고 왔다. "얘가 오늘 왜 이래"라고 말하는 듯한 친구의 눈이 떠올라 창피했다. 지난주에는 혼자 설거지를 하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뭔가 잘못되었다 싶어 심리상담을 왔노라 했다. 도마씨가 중얼거리는 말들은 욕이었다.
이렇게 조용한 사람이 이렇게 시끄럽게 살다니. 그는 작은 목소리로 쉼 없이 이야기했다.
당신도 우리 도마씨에게서 모순을 발견했는가. 그는 사람들의 거친 말을 흘려듣지 못하고 자기 내면으로 가져와 많은 소리로 증폭시켜 다시 타인에게 험담을 퍼뜨리게 되었다. 사실 속이 너무 시끄러워서 창문을 열어 소음을 빼내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흘려듣기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성격적으로 흘려보내기가 쉬운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무던한 사람일 수도 있고 둔한 사람일 수도 있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고 이기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혹은 '신경 끄기 기술'을 잘 사용하는 사람도 흘려듣기를 잘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 도마씨는 성격적으로 흘려듣기가 쉽지 않다. 유명한 자기 계발서를 읽어도 겉으로만 맴도는 느낌이다.
도마씨의 소음 제조 과정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외로움'이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외롭다니. 외로운 자신을 알아채고 도마씨는 많이 당혹스러워했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였다. 나이차이 나는 동생이 한 명 있고 말썽 안 피우던 도마씨는 '적당한' 관심 속에 성장했다. 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 많은 아이들이 부러웠는데 나이가 들수록 혼자라는 것이 편하게 느껴진다. 친구들이 몇몇 있지만 일 년에 몇 번 명맥을 이어가는 정도이다. 서로 피해 안 주는 거리에서 조용히 지내는 관계라면 족하다. 도마씨의 관계 스타일이다. 도마씨가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알아챈 것은 엄마가 자신을 안아준 적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한 순간이었다. 물론 도마씨는 가족도 다른 가족들처럼 외식도 하고, 캠핑도 가고, 여행도 했다. 그런데 엄마가 안아준 기억이 안 난다. 아빠는 워낙 무서운 분이라 아예 기대조차 안 한다. 술담배 일절 안 하시는 분이셨지만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것이 있으면 '논리적'으로 혼내시 키는 분이시다. 도마씨가 문득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말했다.
"초등학교 때 친구네 집을 놀러 갔는데 그 집이 너무 시끄러워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요. 그 아이 엄마 아빠가 서로 계속 이야기하고 친구 형제들이 서로 놀리면서 몸싸움하고, 라디오인지 텔레비전이 켜 있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그 집에 자주 놀러 가고 싶었어요!"
도마씨는 자신의 시끄러운 내면의 집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예민한 사람이지만 타인의 말이 그의 마음에서 더 이상 증폭되지 않는다. 여전히 말이 거칠고 목소리가 큰 사람은 싫다. 그러나 도마씨의 외로움을 그런 소음으로 채우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헨리 나우웬은 <The way of the Heart>에서 “외로움(loneliness)”과 “고독(solitude)을 구분한다. 외로움은 결핍의 경험이다. 버려진 느낌, 공허함, 사랑받지 못한다는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어 끊임없이 사람과 인정, 소음과 활동으로 그 공허를 메우려고 한다. 고독은 외적으로는 혼자 있는 모습이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내적 태도이다. 고독은 자신을 수용하는 자리이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경험하는 자리이다. 외로움을 정직하게 바라볼 때 그것은 고독으로 변활 수 있게 된다.
나는 도마씨가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가는 여정을 배웅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 여정이 쉬울 거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많은 장애물들을 곳곳에서 만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적 충만함으로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