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기치 못한

토마스와 도마씨

by 권박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글로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n of Christ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의아해할 것이다. 나는 기독교 고전을 좋아한다. 특히 현대 심리학적 관점에서 따라가다 보면 만나는 거대한 물줄기를 만나는 듯한 책들이 있다. 어거스틴 Agustine, 아빌라의 테레사 Teresa of Avila, 누구보다 시에나의 캐서린 Catherine of Siena 아니면 후대의 키에르케고르 Søren Kierkegaard 같은 이들의 저작은 인간 이해에서 현대심리학 이상의 깊이를 주는 고전이다. 하지만 토마스 아 켐피스는 단연코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더라 들어본 사람이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기독교 고전이다. 나도 당연 이전에 들춰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성과 속을 극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관점이 불편했다. 단호한 말투는 콘크리트 바닥에 앉은 듯 차가웠고 딱딱했다. 토마스는 단연코 불편한 사람이었고 그의 글도 불편했다. 안식년에 ‘위로’가 필요했던 내가 이런 글을 찾을 리 없다.


해외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 여러 해 동안의 강의와 심리상담으로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심리 상담가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 건강이 자산인 직업이다. 쉬지 않으면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해가 된다. 일상을 멈추기로 했다. 모든 물건과 집과 연구소를 정리하고 외국에 있는 가족 집으로 떠났다. 첫 두 달 동안 침대와 소파를 오가며 누웠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대부분 시간에는 창밖의 잔디와 나무를 초점 없이 바라보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차츰 산책을 하고 오래 걷고, 조깅을 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을 하나둘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익숙한 제목의 작은 소책자를 꺼내 무심코 열고 읽었던 문장이다:

저는 수많은 것들을 읽고 듣는 데 종종 지칩니다. 주님은 제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을 잠잠케 하시고 모든 피조물들이 당신 앞에서 침묵하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만이 저에게 말씀하소서 (p. 30)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 어떤 말이, 어떤 글이 순간적으로 내 것이 되어버리는 경험 말이다. 그렇게 나는 토마스와 함께 안식의 몇 달을 보냈다. 짧게 읽고 길게 창밖을 보면서 멍을 때렸다.

토마스는 여전히 단호하고 냉정했지만,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달래거나 칭찬해주지도 않았다.

진실로 심판의 날이 오면, 우리는 무슨 책을 읽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행했는가를 심문받을 테고, 얼마나 잘 토론하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경건하게 살았는가를 심문받을 것이다(p. 31)

심판과 심문이라는 단어를 보고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그런데 나는 이 ‘경건’이라는 말이 많은 그동안의 피로를 해소해 주는 처방처럼 들렸다. 토마스의 위로는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방식과 분명히 달랐다. 그 위로 속에서 제대로 쉴 수 있었다. 그 일 년 동안 나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침묵 속에서, 그리고 특별한 사람들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 토마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로 시작된 선물이었다.

<주의> 실제 그림은 내가 그린 스케치보다는 조금 더 따뜻하게 보이신다는 점


토마스 아 켐피스는 라틴 발음의 이름으로 독일 켐펜 Kempen에서 태어난 토마스를 의미한다. 그의 성은 가족의 직업을 의미하는 헤머켄 Hemerken으로, '작은 망치'라는 뜻이다. 1380년에 태어난 그는 학교를 마치고 수도원에 들어가 평생을 수도사로서 살았다. 명상과 독서만큼 위로가 되는 것은 없다고 여겼던 토마스는 공부하는 수도사였다. 초상화 속 그의 양손에는 늘 펜과 책이 들려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토마스가 수도원 부원장으로서 공동체 안의 수도사들의 경건 생활을 지도하기 위해 쓴 책이지만 수도원 담장을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안내서가 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 책만큼 많은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책이 없을 것이라는 평가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쓰면서 많은 사람들이 토마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신학자나 그리스도인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이해가 되는데 비그리스도 일반인은 왜 이 책을 좋아할까?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토마스의 '명언'을 기억하려 한다.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경건한 삶으로 초대하는 토마스의 말이 그리스도인에게나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들리는 이유가 있다. 세상은 너무 시끄럽다. 끊임없이 네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무엇이든 네가 하기에 달렸다, 네가 네 삶은 너의 것이라고, 네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저기에서 외쳐댄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소리가 우리를 통제한다. 강박적으로 행복해지려 애쓰다 불행해지는 이상한 현상이다.


도마씨


나의 직업은 심리상담사이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심리상담을 가르치고 있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불편감을 넘어 장애를 느낄 정도의 정신 내적인 문제들을 경험할 때 심리상담을 요청한다. 이글에서 등장하는 '우리의 도마씨'는 심리상담을 위해 내 연구실 블루체어 앉은 내담자들이다. 사실 김 씨라고 해도 좋고, 이 씨라고 해도 좋다. 혹은 당신도 해당될 수 있다. 도마씨는 나의 학생이기도 하다. 타인의 돕기 위해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자기 자신임을 발견한 도마씨들이다. 도마씨는 자해하는 자녀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부모님이고, 냉담한 남편과 대화하기 위해 애쓰는 아내들이며, 참혹한 사건을 경험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군인들이다. 나의 도마씨는 고향을 떠나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이고 한국을 떠나 타지에 있는 이민자들이다. 많은 도마씨들이 죽음을 슬퍼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우울증으로 회사로 못 나가고 학교를 휴학한다.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고, 해야 할 행동을 하지 못해 자신을 비난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마씨는 나 자신이기도 하다.


도마씨로 이들을 부르는 이유는, 토마스 아 캠피스의 토마스가 한국어로 도마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문제를 초월한 토마스와 인생의 문제로 허덕이는 도마씨를 만나게 하려고 이 글을 쓴다. 그 간극이 너무 커서 어쩌면 이 글이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을지 염려되기도 한다. 나는 토마스의 말을 도마씨에게 ‘처방전’처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토마스 아 캠피스를 만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일 년 동안 멈추었던 심리상담과 수업을 비대면으로 진행하면서 도마씨들을 다시 만났다. 코로나 상황에서 사람들은 "뭐야?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거야?" 물었고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불안한 도마씨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나 역시 방향을 몰라 그 자리에 멈춰 한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고 그때 메모해 둔 토마스의 글이 떠올랐다. 중세 14세기에 페스트가 유행했을 때 유럽인들이 토마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으며 견뎠다는 이야기가 이해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세상은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느라 나도 도마씨들도 피곤하다. 너무 많은 정보들이 수많은 인터넷 플랫폼으로 쏟아져 나온다. 정보를 많이 가지면 성공할 것 같은 허상이 도마씨들을 괴롭힌다. 세상의 규칙과 속도에 눈치 보며 맞춰 가느라 정신없다. 내가 만나는 도마씨들은 잘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너무 애쓰다가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이제 팬데믹은 먼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간이 지났고 그 사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전쟁,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어안이 벙벙해지는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다. 많은 사람들이 어이없이 생명을 잃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황당한 일들이 끝도 없이 터져 나왔다. 이전에 상담을 종료했던 도마씨가 불안 장애가 다시 시작되었다며 찾아왔다. 우울증이 마치 우리 모두의 디폴트 값처럼 자리 잡고 있다. 너무 시끄러워서 두 귀를 막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토마스 아 캠피스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내가 안식년의 그의 명료하고 단순한 말에서 위로와 쉼을 얻었던 것처럼 나의 도마씨들에게 토마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도마씨들과 심리상담을 진행하면서 나누고 싶었던 토마스의 말을 글로 적었다. [토마스와 도마씨]는 이 둘의 연결 이야기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도 말보다 글쓰기를 좋아했다고 하니 그가 나의 글쓰기를 격려해 주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여기에 실린 도마씨들의 이야기는 그들로부터 사용 허락을 받은 (논) 픽션이다. 감사드린다. 도마씨들 삶의 한 부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특권을 허투루 여기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려고 한다. 도마씨의 삶을 깊게 듣고 그에게 맑은 눈으로 대답하는 토마스를 들을 수 있는 고요한 수도원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 글에서 사용한 토마스의 말은 2009년에 엔크리스토 출판사에서 발행한 작은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