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행복을 위한 세 가지 요소들
우리는 행복을 주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부와 성공, 또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이때의 행복은 부와 성공에 관련된 행복입니다. 금전적 여유와 그에 따른 심신의 안정을 뜻하죠. 미래의 불확실성을 돈의 존재로 완충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런 말도 있습니다. '돈 없어도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지.' 이때의 행복은 안분지족 하는 마음입니다. 무언가에 만족하고 기쁨을 느끼는 상태죠. 누군가 행복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기쁘고 즐거울 거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 두 가지 개념은 어딘가 어설픕니다.
부를 통한 행복은 달콤한 케이크를 먹는 것과 비슷해서, 처음 한 두 조각은 맛있겠지만 점점 달콤함은 사라지고 느끼함이 밀려옵니다. 한계효용이 줄어드는 것이죠.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행복에도 한계효용의 법칙이 적용됨을 밝혀냈습니다. 소득이 일정 수준에 이르고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 증가가 행복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해요.
부와 성공은 지속적인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에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워라밸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금전적 여유만을 쫓지 않아요. 돈만을 맹목적으로 쫓는 것이 마음의 행복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기쁘고 즐거운 마음만이 행복인 것도 아닙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다양한 행복의 모습 중에서 단지 한 가지 모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기쁨은 행복의 충분조건입니다. 기쁘면 행복할 수 있겠지만 행복하다고 해서 마냥 기쁜 것은 아닙니다.
몇 년 전,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심적으로 지친 적이 있습니다. 머리가 복잡해 밖으로 나갔어요. 밤이었습니다. 집 근처 러닝 트랙에서 한참 뛰다 들어왔어요. 씻고 누웠습니다. 뛰다 와서 그런지 다리가 후끈거렸고 샤워 직후라 그런지 온몸이 열로 덮였습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그대로 폭발할 것만 같았어요. 머리는 여전히 복잡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문장이 머릿속에 밀려들어왔습니다. '그래도 살아있다.'
뜬금없이 살아있음을 깨달았다는 게 뭔가 웃기지만 아무튼 이 한 문장이 다른 모든 걱정을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걸음마하듯 천천히 숨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안도했어요. 신을 믿지 않았지만 괜히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누군가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고 전혀 기쁘지 않았지만 행복했습니다. 이런 행복도 있습니다.
최근 긍정심리학에서는 행복을 회복력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행복에 관한 강력한 미신 하나를 비판합니다. 행복은 즐거운 마음 상태라는 미신 말입니다. 그런데 회복력이라는 단어는 왠지 불행에서 행복으로 돌아오는 모양새를 떠올리게 합니다. 불행은 여전히 불행이고 나쁜 것이며,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행복을 좇아야 한다고 오해하기 쉬워요. 이들이 말하는 회복력의 진짜 의미는 정신적 유연함입니다. 유연해서 부러지지 않는 정신적 강인함이죠.
사회심리학자 바네사 부오트는 행복이 언제나 즐겁고 명랑한 상태가 아니라, 불행을 여러 방향에서 들여다보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불행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불행의 행복을 발견해내는 능력. 불행 속에도 행복이 있고, 반대로 행복 안에도 불행이 있음을 인지하는 능력. 그래서 불행할 때도 행복할 때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평안한 상태에서 내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능력 말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런 정신적 유연함, 강인함을 능력이라고 표현한다는 겁니다. 행복은 원래 감정이죠. 그런데 행복에 관해 가장 깊게 연구하는 이들은 행복을 능력이라고 표현한답니다. 능력은 개발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행복해지는 능력을, 정확히 말하면 행복이나 불행에 연연하지 않는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정신적 유연함과 강인함을 키울 수 있습니다.
정신적 유연함은 행복과 불행의 양면성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우리 감정이 얼마나 얄팍하냐면요, 기분 나쁜 상황에서 기분 좋은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져요. 친한 친구와 다툰 적이 있었습니다. 전혀 싸울 일이 아니었는데도 그때는 저도 진짜 속이 좁았어요. 화가 난 상태에서 앞만 보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자취를 해서 고시원 같은 곳에 살았거든요. 집은 좁았지만 그래도 좋은 점도 있었는데, 창문 앞이 탁 트여 있었어요. 창문을 열었습니다. 마침 해가 길게 지면서 노을빛이 내렸어요. 빛을 받으면서 지는 해를 쭉 보다가 눈을 감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빛이 내 화를 씻어주고 있다.' 잠시 그 상태로 있으니 진짜 화가 별로 안나더군요. 오히려 얼른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문자를 남겼더니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요. 그렇게 쉽게 화해했습니다.
정말로 해가 화를 씻어준 건 아닐 겁니다. 그런데 왜 화가 누그러졌을까요. 맞아요. 제가 바랐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 감정에 그만 휘둘리고 싶었던 거예요. 마침 노을이 졌고 저는 엉뚱한 의식(?)을 거행한 뒤에 그걸로 화를 풀었던 겁니다.
이런 마음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불행하면 행복해질 사건을 만들고, 행복하면 불행해질 사건을 만든다고요. 의식하지 않더라도 말이죠. 무척 행복할 때 우리는 불안함을 동시에 느끼기도 합니다. 이 행복이 언젠가 끝날까 두려워해요. 반면 우울하고 지칠 때 우리는 아주 작은 사물이나 사건에서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사건이 힘을 전해준 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힘을 구한 거예요.
제이슨 므라즈라는 뮤지션을 아실 텐데요. 그의 노래 <Life is Wonderful> 중에 멋진 가사가 나옵니다.
소리를 내려면 고요함이 필요해요.
It takes some silence to make sound.
새벽이 오려면 밤이 필요하죠.
It takes a night to make it dawn.
상처주려면 좋았던 기억이 필요하고,
It takes some good to make it hurt,
만족하려면 나빴던 기억이 필요해요.
It takes some bad for satisfaction.
인생은 놀라워요.
Life is wonderful.
인생은 돌고 돌죠.
Life goes full circle.
불행은 미래의 행복을 재촉하고, 행복은 과거의 불행에 빚집니다. 그러니까 무 자르듯 딱 자를 수 없는 것 같아요.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붙어 존재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행복과 불행의 양면성은 알겠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 네, 이제 자기 삶에서 그런 것들을 하나씩 찾아보는 겁니다. 감정의 모호함과 복잡함, 돌고 도는 인생을 느껴보는 거죠. 여러 가지 감정과 마음을 발견하고 그걸 기억해 놓으면 그런 기억들이 우리 마음의 화소가 되고 마음의 해상도가 높아집니다.
취미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까요. 빠른 취미와 느린 취미. 빠른 취미는 짜릿합니다.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날려주죠. 대신 짜릿함 이후에 금방 허무해질 수도 있고 그래서 중독이 될 위험도 존재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개 음주나 흡연이 그렇고, 익스트림 스포츠와 같이 흥분하는 정도가 큰 취미들이 그렇습니다. 감정의 낙차에서 오는 짜릿함을 즐기는 거죠.
반면 느린 취미는 짜릿하지 않습니다. 처음엔 좋은지 잘 모르겠다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데 일단 흥미를 느끼고 좋다고 생각하면 그 좋은 감정이 오래 지속됩니다. 여운이 길게 남죠. 산책이나 명상이 그렇고, 조용히 책을 읽거나 요가를 하는 게 그렇습니다. 느린 취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감정의 균형에서 오는 평안함을 즐깁니다.
느린 취미를 가지면 마음의 해상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마음을 쉬게 해서 정신적 유연함과 감정적 포용력을 키우기 때문입니다. 산책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힐링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서울대 정신의학과 윤대현 교수는 이걸 문화 힐링이라고 부릅니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관객이 되거나 독자가 됩니다. 이때 관객과 독자는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를 보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야기에 자신을 투사합니다. 영화와 책에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죠.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관객의 입장에서 관찰하게 됩니다. 보다 멀리서, 객관적으로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의 뻘과 마음의 늪에서 빠져나와 그것을 멀리서 관찰하는 것. 마음의 해상도를 높이는 좋은 방법입니다. 정신적 유연함을 키우는 방법이에요.
느린 취미를 즐긴다는 건 느린 시간을 향유한다는 뜻입니다. 느린 시간을 향유하는 태도. 이제 이걸 삶 전체에 적용할 차례입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의 삶은 행복과 불행을 번갈아 맞이하거나 함께 경험합니다. 한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발생해요. 간단하게 그래프를 그려보면 아래와 같을 겁니다.
그런데 이 그래프를 받아들이면 한 가지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갑자기 허무해지는 거죠. 어차피 왔다 갔다 출렁이는 인생이니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군. 마음의 해상도 같은 거 높여봤자 어차피 미래의 내 그래프는 똑같을 텐데. 그냥 행복 그래프 위에 올라타서 굴곡진 롤러코스터를 타면 그걸로 끝이겠지. 발전할 게 없겠지.
그러나 우리는 할 일이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외부에서 찾아옵니다. 막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내가 행복과 불행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보다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그 성숙함은 발전 가능합니다. 이런 생각을 반영한 그래프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 글은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방법에 관한 것이지만, 이 글을 읽는다고 해서 곧바로 행복해지지는 않아요. 대신 우리는 더 쉽게 행복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 길게 보아야 합니다. 점점 높아지는 그래프처럼 말입니다.
마음 챙김(Mindfulness)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명상에서 쓰이는 개념인데 매 순간의 알아차림을 뜻한다고 해요. 마음 챙김을 심리학과 의학에 적용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존 카밧 진(John Kabat-Zinn) 교수는 그의 책 <Full Catastrophe Living>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반복되는 행복과 불행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 낼 수 있다고 자신을 믿는 일입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보는 안목을 잃지 않는 것이죠.
The most important thing is to believe in your own ability to persevere through the many ups and downs and to not lose sight of your wholeness and your journey toward realizing it fully.
자신의 삶 전체를 보는 긴 안목, 나는 꾸준히 행복해질 것이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이런 믿음이 중요합니다. 살아있다고 생각했던 날 밤, 저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버틸 수 있다. 계속 살아갈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우울한 마음은 회복을 시작합니다. 정신이 강해지기 시작해요.
지금 이 순간 행복하라. 다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너의 행복하지 않음에는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행복한 무언가를 쫒아야 한다고 채근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엔 행복하지 않으면 지는 거예요. SNS에선 은밀히 행복을 경쟁합니다. 이젠 행복도 스펙입니다.
하지만 행복을 좇으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고 불행에 너무 취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삶의 절반이 행복인 만큼 삶의 절반이 불행인데, 그때의 불행한 삶도 내 삶이잖아요. 내 삶을 절반만 허용하고 사는 건 그 자체로 불행한 일인 것 같습니다.
저는 매일 행복하지도 않고 항상 긍정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매 순간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거기에 솔직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더 행복해지리라는 믿음과 확신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느리더라도 묵묵히 행복해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