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4

주장과 증거(근거)

by 디로

서로의 자비와 배려 아래, 드디어 대화가 시작됐다고 하자. 이제 대화가 어떤 양태로 흘러가는지 볼 차례다.


대화는 반드시 '주장'과 '근거'로 흘러간다.

이를 '주장•증거 공통의 원칙'이라고 하자(이하 '주증 공통의 원칙').


(라고 하면 로스쿨생은 민사소송법 제67조 같은 걸 떠올릴 텐데 그거 말하는 거 아니니까 잠시 잊어두자)


주증 공통의 원칙이란 '주장'은 언제나 '근거(증거)'와 함께여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주장과 근거는 한 쌍이다.


그런데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우리가 어떤 주장을 할 때마다 그와 관련된 논문이나 연구자료를 바리바리 싸들고 상대방에게 제시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 다시 여기서 '자비의 원칙'이 힘을 발한다.

우리는 상대의 주장이 단숨에 이해되지 않거나, 그 주장을 반박 또는 공격하기 전에 반드시 상대에게 '근거'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은 반드시 이에 응해야 한다. 이것이 '근거 제시의 의무'와 '근거 확인의 의무'이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주장 자체로 주장을 하고는 한다. 예컨대 '성매매는 불법(범죄)으로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마땅한 근거를 대지 못한다. '독도는 우리(한국) 땅'이나 '개고기 금지'를 주장하는 경우도 비슷하다. '왜?'냐고 물어보면 적절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그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주장'과 '근거'는 한 쌍이고, 주장하는 자에게는 근거제시의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근거 없는 주장은 주장이 아니라 '억지'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다시 많은 사람들이, 근거를 확인하려고 하지도 않는다(근거 확인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성매매를 합법화 하자'고 주장하면 이유를 말할 새도 없이 돌을 던지고는 한다. "이거 완전 미x놈 아냐?"라며 화를 내거나, 심지어 "너 성매매충이니?" 같은 인격적 모독도 서슴지 않는다.


자, 다시 한번 명심하자.

우리는 '자비'를 베풀 의무가 있다.


주장과 근거를 모두 제시했다면

이제야 우리는 대화의 첫걸음을 떼었다.


고 말하고 싶지만 아직 한 가지가 남았다.


어떤 사람이 어떤 주장을 하며 어떤 근거(타당하고 건전한 근거라고 가정하자)를 제시했다면, 상대방에게 세 가지 선택지가 생긴다.

하나는 그 주장과 근거를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시된 근거들 중 어느 하나를 '반박(부인)'하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그 모든 주장과 근거를 수용하더라도 그러한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 제시의 권리'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의무랑 헷갈리니) '입증책임의 전환'이나 '입증책임의 권리'라고 부르도록 하자.


자, 이제야 정말로 우리는 대화의 첫걸음을 떼었다.

지난 이야기를 복습해 보자.


1. 나의 생각과 감정을 '일방적'으로 전달해서는 안된다. 대화는 양방향의 소통이다.

2. 대화가 시작되기 위해 우리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타인의 주장을 함부로 넘겨짚거나 곡해해서는 아니 되고, 그 사람이 어째서 그러한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3. 마지막으로 어떤 주장을 할 때는, 반드시 그를 뒷받침할 타당하고도 건전한 근거를 함께 제시해야 하며, 상대방에게 수용, 반박 혹은 지적할 권리(기회)를 주어야 한다.


아무튼 내가 아는 대화란 이렇다.

내가 아는 게 아니라 원래 대화란 이렇다.


그런데도 나는 살면서 이런 방식의 대화를 거의 해본 적이 없다. '첫걸음'조차 떼는 것도 한국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라는 마음을 담아 다음 시간에는 대화 시리즈를 왜 연재하게 되었는지 푸념하면서 시리즈를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충 감사하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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