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만나는 사람들에게 교포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는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스타일, 그리고 아마도 이제는 많이 편해진 영어 덕분인듯하다. 그런데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나는 대한민국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영어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토종 한국인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의무 교육을 받았으니, 물론 어릴 적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문법 중심의 한국식 영어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대학교 입학 전까지는 영어로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수준이었다. 특히나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전형적인 이과생이었던 나에게 영어는 그저 수능을 치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골칫덩어리 교과목 중 하나일 뿐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니 영어와 첫 인연을 맺기 시작한 시점은 아마도 대학교 1학년 시절 전공 수업을 끝나고 강의장을 걸어 나오는 길에 플랜카드를 우연히 발견한 순간인 듯하다. 플랜카드에 적힌 내용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필리핀에 있는 대학과 우리 학교가 파트너십을 맺어 여름 방학 동안 영어를 배울 수 있는 특별 프로그램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나는 이제 막 대학교를 입학한 신입생이었고 학점도, 토익 점수도, 대외 활동 이력도 내세울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선정될 확률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자비가 거의 들지 않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어 지원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거짓말처럼 플랜카드를 본 날이 지원서 마감일 바로 전 날이었고, 급하게 지원서를 써서 프로그램 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그 해가 해당 프로그램을 도입한 첫해라 해당 프로그램에 대해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지원자도 많이 없었던 덕분에 운 좋게도 첫 기수로 최종 선정이 되었다.
그렇게 20년 만에 처음으로 가게 된 나의 첫 외국 필리핀. 그곳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내 코와 입으로 훅 들어와서 나를 놀라게 했던 동남아의 덥고 습한 공기, 공항에서 기숙사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창밖으로 바라보았던 낯선 풍경들, 내가 지금까지 알던 세상 속에는 없었던 것들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그렇게 넓고 끝없는 바다에 첫 발을 내디뎠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필리핀에 가기 전까지는 외국을 가야겠다 또는 가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해외여행이 지금처럼 대중화가 된 시기가 아니었고 주변에 해외를 나가본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외국이라는 곳은 나에게 아주 머나먼 곳이었다.
그래서 그전에는 외국인들과 이야기해 볼 기회도 거의 없었고, 필리핀에 도착한 후에도 함께 간 한국인 분들과 대부분 생활을 하다 보니 종종 내가 원하는 것을 영어로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해 가끔 답답함을 느끼긴 했어도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튜터에게 초대받아 우연히 가게 된 현지 파티에서 처음으로 영어라는 장벽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파티에서 막상 외국인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려 하니 머릿속이 하얘지고, 머릿속에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그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그래도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손짓 발짓 모두 섞어가며 단어 몇 개로 힘들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지만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기에는 내 영어실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처음으로 영어를 정말 잘하고 싶고, 잘하기 위해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장벽을 꼭 부수고 마리라!'
그래서 그곳에 있는 동안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느냐고? 내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이 너무 신기해서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느라 영어 공부를 할 겨를이 없었다. 낮에는 룸메랑 필리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버블티를 마시느라 바빴고 저녁에는 기숙사에서 몰래 빠져나와서 기숙사 앞에 있던 바에서 피나콜라다를 마시느라 바빴다.
그곳에서 시간은 정말 꿈같았다. 한국에서는 평생 누려본 적 없는 호사를 누려보기도 하고, 주말에는 사진 속에서만 보던 화이트 샌드 비치에 누워 여유를 만끽하기도 했다. 우연한 기회에 모델 패션쇼 파티에 초대받아 필리핀 현지 모델들과 파티를 즐기기도 하고, 모델로 초대받아서 촌스럽기 그지없는 반짝이 필리핀 전통의상을 입고 화보 촬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놀면서 새로운 것들을 보고,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음식을 먹으면서 점차 알게 되었다. 내가 20년 동안 알고 있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물론 책 속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익히 봐왔기 때문에 머릿속으로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내 오감을 통해 느끼고 내 가슴속에 와닿았을 때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깨달음이었다.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지고, 내 입으로 맛보고, 내 코로 맡고, 내 귀로 들었을 때 비로소 나의 세상이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내가 모르는 다른 세상이 너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필리핀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다른 나라는 도대체 어떨까?
넓고 끝없는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영어를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만일 당신이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을 불러 모아 목재를 가져오게 하고 일을 지시하고
일감을 나눠주는 등의 일을 하지 마라.
대신 그들에게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줘라.
-생텍쥐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