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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스럽터 Aug 30. 2022

영어(3) 자의식 해체의 순간


나의 네 번째 바다, 핀란드


그렇게 매년 새로운 곳을 경험했으니, 바다에 대한 갈망이 이제는 사그라들 만도 한데 잠잠해지긴커녕 점점 커져만 갔다. 이번에는 유럽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유럽 대학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하려고 알아보니 토플 점수가 필요했다. 토플은 토익과 달리 리딩과 리스닝뿐만 아니라 스피킹과 라이팅 과목이 있어서 독해와 영어 듣기 위주로 교육을 받아온 나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시험이었다. 심지어는 시험 아티클 내용이 대부분 아카데믹한 내용이라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단어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유럽에 한번 가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학기 동안은 오전 시간에 학교 수업을 모두 몰아서 듣고 오후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해가  때까지 토플 공부를 했다. 점심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고구마와 우유로 점심을 때울 정도였으니 그때가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때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악착같이 노력한 덕분에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교환학생에 지원할  있는 턱걸이 토플 점수를 받을  있었다.


미국에 갔었을 때 한국인들과 대부분 생활하다 보니 영어도 크게 늘지 않았고, 현지 문화도 접해볼 기회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한국인이 최대한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 지망은 핀란드로 썼고, 2 지망을 에스토니아로 썼다. 운 좋게 1 지망으로 썼던 핀란드 경영 대학에 최종 선정이 되어서 졸업을 코앞에 앞두고 또 한 번의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다.




핀란드의 칠흑 같은 어둠


교환학생을 지원하기 전까지 내가 핀란드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자일리톨 광고에서 본 휘바 휘바 할아버지뿐이었다. 구글 검색을 해보니 날씨가 엄청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나라라고 하길래 두꺼운 겨울 옷을 캐리어에 한가득 싸서 핀란드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새로운 바다에 도착했다.


교환학생으로 갔었던 핀란드 한켄 경제 대학

그런데 핀란드에 도착해서 막상 첫 학교 수업을 듣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고 앞 길이 막막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들린다고 생각했던 영어가 거짓말처럼 하나도 안 들리는 것이다. 평생 미국식 영어만 들으며 영어 공부를 해왔던 터라, 나라마다 제각각인 유럽인들의 악센트가 너무나도 낯설어서 그들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핀란드 대학 수업은 한국과 달리 교수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롭게 질문하고 답변하고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어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한순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름 그동안 영어를 열심히 했다고 자부했고, 어려운 토플 시험까지 치고 왔는데 이렇게까지 안 들린다고? 처음 필리핀에서 언어 장벽을 마주했을 때는 앞으로 좀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면, 핀란드에서 장벽을 마주했을 때는 그동안의 내 노력들이 마치 헛된 것 같이 느껴져서 좌절감이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게다가 내가 핀란드에 도착했던 시기가 한겨울이었어서 오후 3시만 되어도 벌써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왔다. (핀란드는 여름이 되면 해가 지지 않고, 한겨울에는 2~3시만 되어도 깜깜해진다.) 학교에서 하루 종일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다가 기숙사에 돌아오면 이미 세상은 깜깜해져 있었고,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가족도 없었다. 기숙사에서 혼자 창문 밖의 핀란드의 칠흑 같은 어둠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났다.


핀란드에 있는 동안 지냈던 기숙사




수업도 파티도 열심히 출석했던 나날들


그렇게 좌절과 외로움의 첫 일주일이 지나고,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우울증에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교환학생 친구들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내가 영어를 잘 못하니 이해해 달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내 첫인사였다. 다행히도 말귀도 잘 못 알아듣는 나를 많이 배려해 주고 또 내 엉성한 영어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주는 마음씨 좋은 친구들을 만난 덕분에 조금씩 핀란드 생활에 적응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 먼 땅에서 내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그들뿐이었기 때문에 학교 수업을 마친 후에는 그들과 매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럽인들의 억양에도 점점 적응이 되었고, 그렇게 안 들리던 영어도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매일을 함께 했던 교환 학생 친구들과


하지만 여전히 학교 수업은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한국어도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학 전공 수업을 영어로 듣고 이해하고 토론하고 시험까지 치려니 영어실력이 부족했던 나에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핀란드 대학은  수업마다 과제가 있어서 과제까지 영어로 써서 제출해야 했으니 매일이 나에겐 도전이었다. 수업 시간에는 수업 내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온몸 신경을 곤두세워서 듣다 보니 수업을 듣고  후에는 항상 배가 고팠다. 그렇게 힘들게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면 피곤해서  만도 한데, 그렇다고 파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매일 저녁 친구들과 파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원없이 놀았던 교환 학생 시절




홀로 떠난 스웨덴 여행에서의 깨달음


그렇게 밤낮을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첫 번째 term이 끝나 있었다. (참고로 핀란드 대학은 '학기'가 아닌 'term'제로 운영이 되고, 1년에 총 4개의 term이 있으며 각 term 사이에는 1~2주간의 휴식 기간이 존재한다.) 새로운 term이 시작하기 전 몇 주간 휴식 시간이 있으니 어디로든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핀란드로 오는 비행기 옆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스웨덴에 놀러 오라고 한 것이 문득 생각이 났다. 항공편을 알아보니 생각보다 비행기 표도 저렴해서 바로 비행기 티켓을 끊고 무작정 스웨덴으로 향했다.


홀로 떠났던 스웨덴 여행


스웨덴에 도착해서 첫 이틀은 호스텔에서 묵었는데, 유럽은 국가 간의 여행이 자유로워서 호스텔에 가면 정말 다양한 국가에서 여행 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보통 혼자 여행을 하거나 심심한 여행자들은 저녁에 호스텔 키친에 각자 요리를 해서 함께 저녁을 먹고 맥주를 한잔하기도 하는데, 나도 나 홀로 여행자였기 때문에 호스텔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 했다. 맥주도 같이 한잔하면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방금 전 상황을 돌이켜보니 내가 평소랑 다르게 영어로 막힘없이 술술 너무 잘 이야기했던 것이다. 내가 초인적인 힘이 있어서 영어를 하루 만에 갑자기 더 잘하게 된 것은 아닐 텐데, 신기할 정도로 그날은 말이 술술 잘 나왔다. 도대체 뭐지?


갑자기 머리가 번뜩했다. 마치 우영우 변호사가 돌고래를   순간처럼.  무의식 중에 호스텔에서 만난 사람들은   보고 헤어질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영어가 틀리든 말든 신경이 별로 쓰이지 않았던  같다. 평소 같았으면 이게 맞는 영어 인가하고    생각하고 말했을 텐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했더니  어느  보다도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있었다. 영어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니 마침내 '영어' 아닌 '대화의 내용' 집중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맥주를  많이 날에는 항상 영어를   자신감 있게 했던 과거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제서야 내가 자신감이 부족해서, 혹여나 실수할까  두려워서 그렇게 영어가  밖으로   나왔던  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영어'라는 것에 갇혀서  외의 것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는 슬픈 사실도 함께.


스웨덴 올드 타운 거리에서

자의식이 해체된 순간


당시에는 내 영어 실력에 대한 열등감과 자의식이 엄청나게 강했던 것 같다. 핀란드에 오기 전까지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고, 한국에 있을 때는 주변 친구들은 항상 내 영어 실력을 칭찬했었는데 이곳에 막상 와보니 내 영어 실력이 여전히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동안의 나의 노력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부족한 내 영어 실력을 스스로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왜 항상 친구들에게 왜 한국인들이 영어를 못하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며 한국 교육 시스템을 비판하기에 바빴는지.


'영어 못하니까 배우러 왔지!' 그렇게 내 부족한 영어 실력을 쿨하게 인정하고 나니 갑자기 머릿속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동안은 '영어로 말하다가 실수하면 어쩌지' '문법이 틀리면 어쩌지' '어순이 맞지 않으면 어쩌지' 이런 생각과 걱정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보니 항상 머리가 무거운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후로는 그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자의식이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스웨덴에서 잊지 못할 순간을 경험하고 친구와 함께 며칠 더 여행한 후 핀란드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전까지 그렇게 안 들리던 강의가 갑자기 잘 들리기 시작했고, 영어도 좀 더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단지 내 생각만 바뀌었던 것뿐인데, 마치 마법을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역시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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