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영어를 더 열심히 해서 후회 없이 한국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때가 다음 term 수강 신청 기간이었어서 혹시나 영어 관련 수업이 없는지 쭉 살펴봤다. 대학 자체가 경영과 경제 분야에 전문화된 학교여서 그런지 아쉽게도 영어와 관련 수업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조금 관련이 있어 보이는 Academic Writing for Business Studies라는 수업을 리스트에서 발견했는데, 강의 상세 내용을 살펴보니 수강 기본 요건이 토플 100점 이상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나는 기본 요건 미달이었지만 그 수업을 듣고 싶은 마음에 무턱대고 수강 신청을 했고, 며칠 후 학교 측으로부터 자격 조건 미달로 수강이 어렵다고 안내를 받았다.
그렇게 통보를 받고선 '영어 못하면 내가 듣고 싶은 수업도 못 듣나'라는 생각에 괜히 억울하고 서러웠다. 그렇게 혼자 우울해하던 중 교수님을 한번 찾아가서 부탁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무작정 수업 담당 교수님을 찾아갔다. 처음 보는 핀란드 교수님에게 내가 다른 학생들보다 두 배 더 노력할 테니 이 수업을 듣게 해달라고 요청드렸다. 교수님이 처음에는 안된다고 하셨다. 수업을 들어봤자 못 따라올 거라고.. 그런데 영어도 못하는 동양 여자애가 불쑥 찾아와서는 수업을 듣게 해달라고 하는 모습이 안쓰러우셨는지 마지막에는 한번 들어보라고 허락해주시며 응원까지 해주셨다.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 할 거라며 겁도 함께 주시면서.
교수님이 겁을 주신 대로 수업을 따라가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사실 그 수업뿐만 아니라 모든 수업이 여전히 어려웠다. 그래도 이전처럼 스트레스를 받거나 정신적으로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수업 듣는 그 자체가 즐거웠다. 예습은 물론이고, 토론 시간에 한 마디라도 더 하려고 할 말들도 미리 연습해서 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해서 간 수업에는 훨씬 더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친 후에는 학교 도서관으로 가서 오늘 수업에서 배웠던 것들을 복습하고, 과제를 하기 위해 관련된 논문들을 찾아보며 두 번째 term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마지막 전공 수업(International Studies)에서는 월마트가 왜 아시아 시장에서 실패했는지를 분석하고 정리해서 많은 학생들 앞에서 영어로 발표를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발표를 하고 내려오는 순간 핀란드에 도착했을 때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했던 내가 이렇게 성장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가 그렇게 대견하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성장하고 있다는 그 뿌듯함이 내가 영어를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해서일까, 영어실력도 쑥쑥 늘었고 기적처럼 수업 성적도 잘 받을 수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꿀 먹은 벙어리였는데, 내 마음가짐을 바꾸니 모든 것이 신기하게도 변하고 있었다.
'강의실에 앉아서 수업 듣는 것보다 때로는 여행을 통해 배우는 게 더 많을 수도 있으니까요. 학생 때 여행 많이 다니세요!' 학교 수업 도중에 어느 교수님이 하셨던 말이다. 한국에서는 출석 체크가 학점과 직결되기 때문에 학기 중에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학점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핀란드 학생들은 학기 중에도 여행을 수시로 떠났다. 수업 담당 교수님께 미리 여행 일정을 공유하고 양해를 구하면 그 수업 내용을 보충할 수 있는 과제를 대신 제출하는 방식으로 출석을 인정해주었다. '맞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세상에 나아가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은데 나는 왜 책상에 앉아 책 내용을 달달 외우는 것이 배우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살아왔을까.'
자유로운 핀란드 교육 시스템 덕분에 학기 중에도 여행을 많이 다닐 수 있었다. 특히나 버디들이 주말마다 다양한 여행 프로그램을 짜준 덕분에 교환 학생 친구들과 핀란드 이웃나라 여행을 다니면서 추억을 정말 많이 쌓을 수 있었다. 한껏 멋 부리고 갔다가 동상 걸릴뻔 했던 에스토니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웅장했던 러시아, 마치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던 라플란트. 그렇게 새로운 바다를 경험할 때마다 내 세상은 확장되었고, 영어를 더 잘하고 싶은 마음도 점점 더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