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모로 순탄치 않았던 20대를 보냈다. 졸업 전후로 가만있질 못하는 놈처럼 돈들이고. 시간들이며 내 진로와 일에 관련해 이것저것 시도해봤지만 하나같이 보기 좋게 실패했다. 이제껏 해온 실패들에 좌절하며 집에 있긴 눈치 보이고, 적적한 날들의 연속… 어느 여름날.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당장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하기 싫은 일이 "넌 뭘 해도 안되니 이거라도 해라." 하면서 결국 나를 찾아올 것 같은 두려움. 따가운 무더위 같던 취업난에 허덕이고 있을 때. 어딘가 내 안의 압박에서 나를 숨 트이게 해 줄 쉼 터가 절실했다.
그리하여 눈높이를 낮춰서 미친 듯이 이력서를 냈고, 그 와중에 하나가 얻어걸려 잠시 그늘 같은 곳이 되어줄 곳을 찾아 숨어 들어가듯 중고서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처음 가본 그곳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저마다의 사연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각자의 목적을 가진 그 사람들과 나란히 서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며 책을 진열하고 팔았다. 도망쳐온 곳에 낙원은 없다고 했던가? 세상 쉬운 일이 없었다. 일을 시작하고 한동안은 어떤 일을 하든 배우는 게 더뎌서 남들 이상으로 초심자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결국에는 견뎌내면서 하다 보니까 늘 부족하다고만 여겨왔던 스스로에게 나 자신도 캐치 못했던 장점을 봐주는 사람도 있었고, 나름의 방식으로 단련시켜주는 사람도 있었고, 친절하게 알려주며 응원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얼굴만 보면 같이 장난치기 바쁜 사람도 하나 둘 늘어갔다.
근무 외 시간에 모여 술 한잔 하며 놀기도 하고, 운인지 실력인지 이 달의 우수사원을 받은 적도 있고, 웃기지도 않는 이상한 제스처를 유행시킨 적도 있고. 맙소사. 할로윈 때는 생전 해본 적 없는 천진반과 조커 페이스 페인팅도 반강제로 했다. 마음 놓을 수 있는 동료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과 때로는 괴롭고 때로는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늘 어렵고 두려운 대상이었던 사회가 나에게 100% 적의로 가득 찬 공간은 아니라는 걸 배워가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나는 그렇게 그 중고서점에서 딱 반년 동안의 추억을 쌓아갔다. 안전한 집이 될 순 없었지만, 시원한 그늘 같았던 그곳에서 그 해의 더위가 가실 때까지 계절을 보내며 조금은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그 곳에서의 시간들이 제법 마음에 들고 즐거웠기에… 또 다시 직사광선 같은 취업전선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어쩌면 그냥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좋다고… 누군가 따뜻한 목소리로 잡아줬으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마음속 어두운 곳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위기감이 내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 그때의 내게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늘 내게만 들려오는 그 소리. "안주하지 말고 더 높은 곳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 라고 재촉하는 소리. 그 짜증나는 소리에 이젠 두려움 없이 알겠다고 답할 수 있다 느꼈을 때. 돌연 나는 다시 안정적이고 성공한 삶과 같은 허상과 근거 없는 자신감, 그리고 "제대로 된 직장" 따위의 목표에 빠져서 내게 들어온 스태프 리더 제안을 정중히 사양하며 짐짓 철든 척. 이젠 앞으로 오래오래 해 먹을 수 있는 기술을 배우겠다며 떠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참 웃긴다. 아니, 제대로 된 직장이 뭔데? 굉장히 추상적이고 밑도 끝도 없는 개념이다. 안정성을 보장하는 직장과 실제로 내가 소속되어 느끼는 안정감은 전혀 별개인 것을… 아무튼 그렇게 개폼 잡고 떠나서 야심차게 시작한 기술 배우기는 생각 외로 적응이 안되고 어려워 내가 그 직업학원에서 3개월도 못 채우고 도저히 못하겠다며 탈주하면서 대실패로 끝이 났다. 고작 몇 년 전이지만 그때는 앞으로 나아감에 대한 이상한 판타지, 고정관념이 있어서 몰랐다. 내가 좋으면 있고 싶은 만큼 안주해도 되고, 그 안에서 성장해 나가는 것도 또 하나의 전진이란 것을. 그렇게 내 마음에 들었던 그늘이라면 작정하고 그곳에 터를 두고, 집을 만들어도 됐을 텐데 말이다.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지난 일이고, 추억은 추억이다.
결과적으로 그때의 아쉬운 헤어짐을 교훈 삼아서 나는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내 소신껏 선택했고, 진정한 안정감을 느끼는 현재의 직장에서 (물론 모든 것이 이상적이지는 않다만…)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뽕을 뽑자는 마인드로 치열하게 뿌리내리려 하고 있다. 이쯤 되면 그래도 내게는 괜찮은 엔딩 아닐까 싶다. 물론 지금껏 해온 실패가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겠지. 지금 쏟고 있는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고, 앞으로 더 많이, 더 다양하게 실패하고 아플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나의 현재와 내일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서점에서 선물 받은 하나의 경험. 나도 충분히 내가 속한 곳에서 내 몫을 하고 웃으며 타인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 소중한 경험 덕분일 것이다. 그때의 여름을 함께 보낸 사람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이상기후 가득한 세상일지라도 우리 각자의 삶에서 웃음 잃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