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명의 깊은 뜻이런가 띄엄띄엄 살지 말라고 고양이를 맡기셨나봐 그리하여 총총거리며 촘촘히 살고 있다 .......
- 황인숙, <<아무 날이나 저녁때>>
#1. 아직도 시를 쓰고 있어
친구를 기다리기 위해 들른 시집 서점. 책을 들추다가 반가운 이름이 보여 집어 들었다. ‘어머, 아직도 시를 쓰시는구나’. 28년 전 그녀의 원고를 받으러 갔었는데 아직도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시집 한 권이 기억을 거꾸로 과거 속으로 돌려놓는다. 나의 시계가 20대일 때, 난 회사의 홍보실 직원이었다. 첫 직장의 위계질서 가득한 일들은 몸에 잘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했지만 유독 사보 만드는 일은 내 일처럼 느껴졌다. 실적과 상관없으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돈과 직결되는 광고일은 내 차례까지 오지 않았고) 제때 나오기만 하면 별로 터치하지 않던 그 일이, 이상하게 가장 내 일 같고 애착이 갔다. 조금 신경 쓰이지만 재미있고 잘하고 싶은 일. 그냥 해도 되는 일이건만 하면 할수록 원고 청탁이나 사람 만나는 일에 욕심이 났고,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원고 청탁하는 일은 생각보다 신났다.
# 2. 집요한 섭외 빨이었네
지금 생각하면 방송작가 3대 덕목이라는 섭외 빨, 구성 빨, 글빨 중 하나인 '섭외 빨'이다. 지금도 섭외는 늘 힘든 영역이지만 방송작가가 되기 전에 더 섭외에 진심이지 않았나 싶다. 예를 들면, 원고 청탁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소설가를 설득하기 위해 난 문인들이 모여 있다는 인사동 술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에 잠시 취재차 왔다 간다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청량리 기차역으로 달려가던 그때. 나도 몰랐던 내 안에 '적극성'이 튀어나오는 건 의외의 발견이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에피소드는 베스트셀러로 유명한 소설가에게 했던 집요한 원고 청탁이다. 일주일 내내 전화를 돌렸지만 응답 메시지만 돌아갈 뿐 통화가 되지 않았다. 핫한 이 작가에게 원고를 꼭 받고 싶다는 오기가 생겨서 시간이 날 때마다 대답 없는 전화기에 메시지만 남겼다.
“ ~ 작가님, 원고 청탁드리려고 전화드렸어요....... 꼭 답신 부탁드립니다. ”
거의 한 달 내내 전화를 돌렸건만 원고 청탁 마감이 넘어설 때까지 연락이 닿지 않던 어느 날. 그 소설가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취재차 해외에 나갔다 왔는데 전화가 너무 많이 와있었다며 사내 번호 550번과 통화하고 싶다고. 한 달간 전화질을 해댄 그 사내 번호 550번은 나였다.
아... 이 집요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당시 외부 원고 청탁은 나의 절박함이지 않았을까.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나에 대한 쓸모. 재미없던 회사 일에 대한 반작용 같은. 그렇게 한 달간 애를 태운 소설가를 만나러 그의 서교동 집필실로 찾아갔건만.... 곧 장편소설 집필을 시작한다며 사보 원고를 쓸 시간은 안 된다고 청탁을 거절했다. 대신 나의 오랜 전화 섭외에 대한 미안함에 술과 밥을 사주겠다고. '내기'를 좋아하던 소설가는 내가 데려간 대학생 남자 친구와 '내기 당구'를 제안했다. 처음엔 비슷해 보였지만 결국 남자 친구의 패배로 끝! 승부와 상관없이 그는 우리에게 밥과 술을 사주며 밥에는 손을 안 대고 술을 밥처럼 마셨다. 비록 원고 청탁의 목표는 실패했지만 섭외의 새로운 경험치를 만들어주었고 그 일은 우리 부부의 공통된 추억이 되었다.
# 3. 청파동 옥탑방의 그 시인
이제 시집 서점에서 만난 반가운 그 시인의 에피소드.
그때도 문제는 마감이었다. 원고 마감이 지났는데 연락이 없다. 할 수 없이 원고 독촉 전화를 돌렸다.
“ 작가님... 마감이 지났는데.... 아직 다 못쓰셨나요?”
“그럼, 우리 집으로 원고 받으러 올래요”
우연히 읽은 그녀의 시들은 입에서 단어들이 통통 튀는 '팝콘' 같았고 읽고 나면 씩 웃음이 나고 기분이 좋아지는 시였다. 시를 읽고 좋아서 그녀에게 원고 청탁을 해 둔 거였는데 '마감'이 지나가고 있었다. 원고를 받으러 직접 가는 방법이 제일 빨랐다. 퇴근 후, 그녀가 알려준 주소를 찾아간 곳은 청파동 어느 언덕에 있는 옥탑 방. 문을 두드리고 원고만 살짝 받아갈 생각이었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변이 돌아왔다.
“ 아직 뒷부분을 다 못썼는데 들어와서 조금 기다릴래요?”
“ 아... 네....”.
“ 아직 저녁 안 먹었죠?
"아... 괜찮아요. 그냥 기다릴게요. “
내 대답과 상관없이 시인은 벌써 부엌 한쪽에서 생선을 굽고 있었으며 그렇게 뚝딱 따뜻한 밥상을 차리며
“밥 먹는 동안 뒷부분 마저 쓸 테니까 편하게 먹고 있어요.”
세상에! 원고 쓰는 동안 밥을 먹으라고! 세상 불편하고 어색한 밥상이지만 그녀에게 원고 쓸 시간을 주기 위해 천천히, 그러면서 남기지 않으려고 열심히 밥을 먹었다. 저녁때 낯선 동네에 혼자 가기 무서워 당시 학생인 남자 친구를 혹처럼 데려갔는데 그도 덩달아 뜨끈한 밥에 생선구이까지 거하게 차린 저녁 밥상을 먹게 되었으니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그러나 어쩌겠나. 원고 쓸 시간을 주기 위한 이유 있는 밥상이었으니. 불편하면서도 이상하게 명치끝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이상야릇한 저녁상은 동화 속 한 장면처럼 기억된다. 한쪽에는 시인이 앉은 책상에서 등을 돌리고 원고를 쓰고, 좁은 옥탑방 한편에서는 낯선 방문객이 달그락달그락거리며 밥을 먹고 있었으니. 그렇게 어색하게 저녁밥을 거의 다 먹어갈 때쯤 그녀의 원고도 끝이 나있었다.
“어떻게. 늦게 줘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밥까지 차려주시고......”
봉투에 단정하게 넣은 원고를 받아 나오는데 시인이 갑자기 남자 친구의 손을 잡더니 돈 만 원을 쥐어 주었다. 늦었으니 택시를 타고 가라고. 괜찮다고 했지만 아까 거부할 수 없던 그녀의 저녁상처럼, 또 뭔가에 홀려 차비를 받아 들고 나설 수밖에. 오히려 내가 돈을 드리고 싶을 정도로 넉넉지 않아 보이는 시인의 집이었는데. 눈에 밟혀 뒤를 돌아보았다. 시인은 우리가 언덕을 다 내려갈 때까지 고양이를 품에 안고서 한참을 서서 배웅해 주고 있었다. 액자 속 풍경처럼.
# 4. 밥상 차리던 시인을 기억하며
그 후에도 띄엄띄엄 나오는 시집을 보며 그녀의 안부를 확인하고 그녀가 차려준 그날의 따뜻한 저녁상을 떠올리곤 했다. 오랜만에 신간. 그녀는 아직도 그 집에서 살고 있고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와 그보다 더 많은 고양이들을 돌보는 캣맘으로 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20대 때, 나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 준 유일한 시인. 시인은 날 기억 못 하겠지만 나는 잊지 못한다. 그때는 어려서 밥 먹는 일이 대단한 일인지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밥의 위대함을, 밥 속에 따뜻함을 알아가며 그때의 고마움은 '술처럼' 곱게 익어간다.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밥상을 차려주고, 글보다 더 따뜻한 삶의 한 조각을 보태줘서 그 시절 암울하고 막막한 나의 젊은 시절에 소중한 기억을 만들어줘서 감사했다고.지금도 우울하면 그녀의 명랑 발칙한 시를 읽어보는데, 여전히 고양이는 그녀의 뮤즈인 듯하다.
..... 띄엄띄엄 살지 말라고 고양이를 맡기셨나봐 그리하여 총총거리며 촘촘히 살고 있다.....
시 한 편이 따뜻한 밥 한 끼도 못 되는 세상이지만 그녀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어줘서, 아직도 시를 쓰고 있어서 고맙고 또 고맙다. 그리고 글보다 더 따뜻한 삶의 한 조각을 내 인생에 무늬로 만들어줘서 더욱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 밥상 차려주는 시인이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