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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네 컷처럼

- 심리학자 서은국 교수의 한 마디-

"행복을 압축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다."


- 서은국 교수, 2020 그랜드마스터 클래스 강의 중에서 -



1. 행복을 압축한 한 장면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에 들은 강의 주제는 서인국 교수의 <누가, 언제, 왜 행복한가?>였다. 행복이란 유전적 요소가 강해서 기질적인 면에서 '외향적인 사람'이 유리하단다. 그 이유는 외향적인 사람이 행복의 스위치가 잘 눌러져 행복한 기회와 빈도가 높기 때문이라고. 진화론의 관점에서 행복을 압축한 한 장면을 들라고 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생존에 훨씬 유리하다. 혼자보다는 함께일 때, 음식을 먹을 때 생존의 확률이 높기 때문에 행복은 생존에 유리한 방식으로 발전되어왔다는 이야기. 뭐 그동안 행복에 대한 담론과 철학적인 이야기는 참 많다. 관점은 다 다르겠지만, 행복을 압축한 한 장면만큼은 반박할 수 없다. 그래,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만큼 행복한 때가 어디 있나. 어떤 이론 없이도 공감하는 장면. 이것이 인류의 행복을 압축한 한 장면이라면, 내게 남은 인생의 장면도 있다.




2. 아들의 인생 네 컷

군대 간 아들이 남겨 놓은 사진들. 요즘 많이 찍는다는  인생 네 컷이다. 입대 전 날 머리를 깎아도 된다고 말렸지만 미리 깎는 게 마음 편하다며 일찍 머리를 밀어버린 아들. 군입대 분위기를 내며 친구들과 사진을 찍기 위한 것이었다. 인생 네 컷! 2017년 대구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인생 네 컷은 가장 효율적으로 그날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남겨놓는다는 의미를 숨긴 채, 즉석사진의 대명사가 되었다. 인생 네 컷. 과연 그 정의처럼 4개의 컷 안에는 머리를 빡빡 민, 군입대 직전 아들이 느끼고 있는 오묘한 표정이 스며있다. 두려움, 싫음, 나 몰라라 포기, 잠깐의 행복. 솔직히 꼭 그런 마음이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엄마의 눈에는 스치듯 입대를 앞두고 느꼈을 아들의 알록달록한 표정들이 인생 네 컷에 남아있다.  그냥 사진일 뿐이지만 군입대 전 남긴 아들의 사진을 보면, 엄마 앞에선 감추고 싶었을 아들의 솔직한 표정이 보인다. 아들도 몰랐을 표정이.




3. 술로 얼룩진 송년의 그날

오래전 케이블 채널을 따는 대규모 사업 기획서를 내고 마지막 심사가 발표되던 날이었다. 결과는 탈락. 6개월 이상을 쏟아부었기에 함께 한 팀원들의 실망도 컸다. 찝찝한 기분으로 낮술로 시작해 술자리는 밤까지 이어졌다. '술'을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던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 한잔 두 잔 받아먹으며 몇 차까지 이어진 술자리의 끝. 결국, 탈이 났다. 그날은 한 해의 마지막 날. 남편도 인근에서 회사 사람들과 송년회 중이었다. 하지만 내가 필름이 끊겨 쓰러졌다는 동료들의 전화를 받고 송년회 회식을 하다 말고 나를 들춰 업고 왔다고 (한다). 다음날은 새해 첫날. 내가 입었던 옷은 빨 수가 없을 정도라 모두 쓰레기통에 들어갔다고 (한다).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친 역대급 술 사고. 남편이 술을 좋아해 너그러운 건지, 아니면 빨리 잊은 건지,  이 일로 잔소리도 한번 하지 않고 그 후로도 한 번도 이 사건을 꺼내지 않았다. 가끔 남편과 다툼이 생기거나 미울 때면 막판에 이 장면이 떠올랐다. '맞다, 이 사람 그때 그랬지. 치사하게 그 사건을 우려먹거나 잔소리하지 않았잖아.' 내가 남편을 용서하게 만드는 소중한 한 장면이다.   




4. A4 23장으로 남은 눈물 원고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휴먼다큐 한 편이 기억난다. 아이템이라고 부르는 주인공을 정하는 일부터 난관이었다. 서브작가랑 100곳 가까이 전화를 돌리고,  괜찮다 싶은 사람들을 만나러 일주일 내내 목포로, 원주로, 순천으로, 의정부로  답사를 다녔지만 허탕이었다. 펑크가 나겠다 싶을 때쯤 찾은 가족은 교도소에 있는 남편을 두고 엄마 혼자 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이틀 정도 찍었을 때 주인공 엄마가 갑자기 찍기 싫다고 전화가 왔다. 이제 와 그러면 안 된다고 어르고 달래서 겨우 촬영을 이어갔는데 이번엔 촬영장소가 문제. 교도소에 남편 면회를 가기로 했는데 촬영 허가가 안 났다. 사방팔방 공문을 보내고 지인들까지 동원했지만 감감무소식. 보이고 싶지 않겠지만, 상황을 이해시키려면 보여줘야 하는 방송의 딜레마. 기다리는 내내 악몽을 꾸고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결국, 몰카로 그 장면을 해결하고 겨우 방송이 나간 후. 내게 남은 건 A4 23장뿐. 이러려고 난리를 쳤나. 눈물콧물 쏟은 방송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일은 흩어지고 A4지 몇 장으로만 남을 뿐이다.  




5. 30여 장의 사진으로 남은 부모님의 80년

부모님 자서전을 쓰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글과 함께 자서전에 들어갈 사진을 찾아달라고 엄마한테 부탁했다. 두 분의 결혼, 부모님의 어린 시절, 자식인 우리들의 어린 시절, 그리고 지금 노년의 모습까지 골고루 찾아달라고 했더니 엄마는 그 자리에서 30장쯤 되는 빛바랜 사진을 서랍에서 꺼내서 주신다. 뭐, 이렇게 금방 가능하지. 언제부턴가 엄마는 앨범도 다 버리고 딱 요만큼만 남겨 놓으신 거였다. 앨범에도 넣어 두지 않고 작은 상자 하나에 추려 놓은 30여 장의 사진. 워낙 정리 잘하시는 성격의 엄마는 다른 사람의 손이 타지 않도록 사진마저 미리 정리해 놓으신 거였다. 사진도 많아봤자 소용없다면서.... 엄마의 75년이, 아버지의 80년의 인생이 겨우 30장의 사진으로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기분이 참 묘했다.   




6. 애프터 양의 메모리_인생의 장면들

얼마 전 본 영화 <애프터 양>이 떠오른다. 딸의 문화적 뿌리를 찾아주고자 구입한 중국인 로봇 양. 여동생은 아빠보다 오빠로봇을 더 믿고 따른다. 그렇게 가족 같은 로봇이 어느 날 갑자기 고장이 난다. 아빠는 고장 난 로봇을 고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신 로봇의 가장 중요한 메모리를 보기로 한다.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까? 거기에는 하루 중 로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2,3 초의 짧은 순간들이 있었다. '태양 빛이 들어오는 창문, 식탁 위에 음식, 웃는 표정, 가족사진을 찍을 때의 표정, 죽어가는 엄마를 바라보는 아들'. 특별하지 않지만 로봇이 하루 중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2,3초의 짧은 순간이 기록돼 있다. 알파, 베타, 감마의 기록으로. 로봇이 만났던 세 사람과 보낸 시간을 메모리로 기록하고 있었던 것. 사람이라고 얼마나 다를까? 인생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힘들고, 말도 안 되게 열받고, 슬프고, 화나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으며 나이 들지만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가다 보면 결국, 로봇양처럼 짤막한 순간들만 내 인생 메모리에 남을 것 같다.




7. 내 인생의 명장면을 위해

행복을 압축한 한 장면처럼, 군입대 전 아들의 솔직한 표정을 담은 인생 네 컷처럼, 화날 때 남편을 용서하게 만드는 한 장면처럼,  울고불고 내보낸 방송 뒤에 남은  23장의 원고처럼,  80년 부모님 인생을 보여주는 30장의 사진처럼.  내 인생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몇 가지 중요한 장면만 남지 않을까. 긴 인생도 인생의 몇 컷만 남기며 흘러간다면, 제대로 된 몇 컷을 남기기 위해 난 오늘을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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