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밥 먹을까?"
"좋아요~ 근데 이번 주는 제가 약속이 있고 다음 주는 어떠세요?"
"다음 주는 남편 재택이야... 그다음 주에 보자."
"아 네 그래요^^"
대화를 마치고 생각했다. 남편이 재택인 거랑 내가 점심 약속 잡는 것이 무슨 상관?
이 곳 싱가포르는 코로나 이후 많은 회사들의 출근이 정상화되지 않고 대부분 격주로 출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 주는 회사로 출근하는 주 그다음 주는 재택근무를 하는 주, 이러한 근무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들어보니 남편들이 집에서 일을 할 때 아내가 밥을 챙겨주지 않으면 굶기 때문에 아내들이 남편이 재택근무를 할 때는 바깥 약속을 잡지 않고 집에서 남편 밥을 챙겨줘야 한단다. 따라서 자연히 남편의 스케줄을 따라 남편이 회사에 출근하는 주에 여자들도 점심 약속을 잡는다는 것이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나는?
우리 남편 역시 현재 격주로 출근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나는 남편이 집에서 일을 하는 날에 점심 약속이 생기면 굳이 그것을 남편이 집에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미루거나 취소하지는 않는다. 평소 아이와 남편의 끼니는 챙겨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두는 편(데워먹으면 되도록)이기도 하고 때로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배달음식을 시켜먹거나 한 끼 정도는 나가서 사 먹어도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싱가포르의 대부분의 가정은 음식을 집에서 해 먹지 않고 가까운 호커센터(hawker centre, 재래시장에 딸린 저가의 노점 음식점)나 식당에 가서 사 먹는다. 부부의 대부분이 맞벌이이기 때문에 집에서 음식을 해먹을 시간이 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집에서 일하는 안티(입주 도우미)가 있어도 대부분 아이를 보고 청소와 빨래 등 가사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애당초 한국처럼 유난하게 아내가 남편의 밥을 차려주는 문화 자체가 없다. 그래서 이 곳에서 만난 한싱 커플(한국인과 싱가포리안이 결혼한 경우)들과 얘기하다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흥미로운 얘기 중 하나는,
"우리 남편 친구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게 한국 여자랑 결혼한 거래, 왜냐면 한국 여자들은 남편한테 밥을 차려준다고 그게 대박이래. 아내가 남편한테 밥을 차려주다니, 자기들도 그런 한국 여자랑 결혼하고 싶다고 부러워한대잖아."
현재 싱가포르는 K 드라마가 대유행이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택시만 타도 기사님들이 내가 한국인인걸 알아채는 즉시 드라마 얘기를 해댄다. 덕분에 나도 모르는 한국 드라마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곤 하는데 아무튼 나는 잘 챙겨 보지 않는 그 드라마에서는 아직도 결혼하면 여자가 남자 밥을 차려주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나 보다. 싱가포르 남자들 마저도 아내가 차려주는 밥에 로망이 있었나 보다.
한국 남자들은 왜 유독 '차려주는 밥'에 집착하는 것일까. 얼마 전 이혼 사유의 가장 많은 이유 중 첫 번째가 '아내가 아침밥을 안 차려줘요'라는 것이라는 어떤 이혼 전문 변호사님의 글을 보았다. 많은 남자 의뢰인이 이것을 이혼 사유로 주장한다는 것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경우 실제로 아내가 아침밥을 차려주지 않은 경우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예상하듯 '남편이 아침밥을 안 차려줘서요.'라고 말하는 여자 의뢰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다음 주에 그녀들과 약속대로 점심을 먹었다.
"오늘은 출근하셨어요?"
"응~ 아우 진짜 빨리 맨날 출근 좀 했으면 좋겠어. 집에 있으면 이거 챙겨줘야 해, 저거 챙겨줘야 해, 나 어디 나가지도 못하게 해. 피곤하다 정말. 너네 신랑은 안 그래? 혼자서 밥을 잘 챙겨 드셔?"
"음, 저는... 글쎄 밥 때문에 그런 적은... 밥을 혼자서 먹을 때도 있고 같이 먹을 때도 있고 그런 거지. 다 큰 어른이 왜 혼자서 밥을 못 드시죠?"
"아니 못 먹는 게 아니고 안 먹어.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너네 신랑이 너를 불편하지 않게 해 주는 거야. 우리 남편은 내가 어디 나가면 들어올 때까지 밥을 안 먹고 기다려. 아무리 뭘 챙겨주고 나가도."
우리 남편이 나를 불편하지 않게 해 준 거였던가. 아니면 내가 무신경한 건가.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어른이 그놈의 밥 하나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를 이리 가지도 저리 가지도 못하게 신경 쓰이게 한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나로선, 그것을 그들 부부만의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거꾸로 남편은 본인이 출근했을 때 자기 아내가 집에서 살림하고 애 돌보느라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있는지에 대하여 걱정하고 애써주는지가 의문이다.
실제로 우리 남편은 내가 있건 없건 나에게 밥 따위로 어리광이나 투정을 부리지는 않는다. 우리는 평소에 하루 세 끼 중 두 끼를 함께하고 많은 대화를 식탁에서 나누며 그 음식은 내가 집에서 만들든 밖에서 사 먹든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가족의 건강을 위하여 집에서 음식을 자처하여 만드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고 그 음식을 남편도 아이도 매우 맛있게 잘 먹는다. 그래서 딱히 남편이 집에 있다고 귀찮다거나 빨리 출근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지도 않고 덩달아 그런 일로 다투지도 않는다. 부부가 함께 집에 오래 있으면 싸운다는 것은 분명 시간을 내어 대화를 통해 조율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냥 덮어둔 채로 있기 때문에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힘이 드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한국 남자들은 여기까지 와서도 아내가 차려주는 밥에 집착하고 사는 모양이다.
그리고 한국 여자들만 그렇게 "밥밥돌밥" 거리며 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