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는 일제의 잔재였다
유치원 졸업을 앞두고 유치원에서 슬립오버를 하던 날이었다. 우리 부모님을 포함한 여러 학부모들이 모인 가운데 아이들의 장기자랑이 한 차례 진행되었고 그 후 자리에 앉아 돌아가며 선생님이 인터뷰를 하던 순간이었다. 난 당시 마음에 들지 않는 '닭' 의상을 입고 '꼬꼬댁 춤'을 춘 뒤였다. 얼굴에는 빨갛고 노랗게 분장도 했었다.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커서 뭐가 되고 싶어요?"
유난히 숫기가 없고 말 수가 적었던 나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요..."
그리고 곧이어 선생님은 내 옆자리의 여동생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동생은 뭐가 되고 싶어요?"
그러자 자신 있고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한 동생,
"아빠요!"
순간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아직 다섯 살이었던 내 동생이 남자와 여자에 대한 개념이 있을 리 만무했겠지만 나는 옆에서 그렇게 말하는 여동생이 너무 부끄러워 순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게다가 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닭 의상'을 당장 벗어버리고도 싶었다. 그 날 학예회에서는 '꼬꼬댁 춤'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청진기를 목에 건 '의사'였다. 그런데 선생님은 의사 역할은 '남자'가 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 역할극을 정 하고 싶으면 환자를 하라고 했다. 환자는 배가 부른 만삭의 산모였다. 그건 일곱 살의 눈에도 왠지 더 예뻐 보이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냥 '닭'이 되었다. 이래저래 유쾌하지 않은 어느 밤 축제의 기억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해마다 적어내는 설문지의 '장래희망'란에는 어느 순간부터 '현모양처'라는 단어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서는 '현모양처'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는데 나는 어떻게 그걸 알게 되었을까. 그리고 중학생이 된 이후로 줄곧 내 장래희망란에는 '변호사'라고 적혀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현모양처를 포기할 수는 없었던지 그 옆 빈칸에는 '현모양처'도 적어내곤 했다.
[현모양처]
정의: 개항기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근대적 여성교육 이념으로 일제강점기 및 현대를 거치며 전통적으로 재구성된 여성상. 근대 주부론·성별 역할분담론.
‘현모양처’라는 여성상, 혹은 그러한 합성어는 조선시대까지 그 용례가 발견되지 않는다. ‘현모(賢母)’가 비슷한 어의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양처(良妻)’는 전혀 다른 의미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양처는 천인 신분의 남자와 결혼한 양인 신분의 처를 의미했다.
이에 비해 1930년대 이후부터는 점차 현모양처에 전통의 색칠이 가해진다. 한편에서는 합리적으로 가정을 운영하는 근대적 주부인 동시에, 동양적 부덕을 갖춘 여성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아시아 차원에서 진행된 서구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그 결을 같이 한다. 특히 ‘신여성’ 및 ‘모던걸’이 서구적 퇴폐문화를 맹종하는 ‘나쁜 여성’으로 표상되면서, 그들과 대척을 이루는 현모양처는 전통적인 여성상으로 의미화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여성이 되어간다.
‘현명한 어머니와 어진 아내’를 의미하는 ‘현모양처(賢母良妻)’는 한국에서 여성의 성별 역할을 핵심적으로 내재한 젠더론·여성론이다. 남성이 직업으로 국가 사회에 공헌한다면 여성은 가정 내에서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국가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임무라는 것이 중심 내용이다. 이는 실질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성별 역할을 정당화시키는 핵심적 기능을 수행해왔다.
현모양처는 단순히 현명한 어머니와 어진 아내라는 어의적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일종의 성별 역할 분담론으로서, 여성이라는 성적 본질론에 입각하여 그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특히 여성이 자녀 교육자 및 남편 내조자로서의 역할을 잘하는, 이른바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서는 무식해서는 안 되고 그 시대에 맞는 지식과 이해력을 겸비할 것이 요구되었다. 이것이 여성이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였고, 근대적 여성교육을 통해 재탄생한 여성이 바로 현모양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현모양처는 근대적 여성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한 한말 및 식민지 시기부터 줄곧 여성교육의 이념으로 기능하였다.
‘현모양처’ 여성론은 20세기 말부터 재해석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전통적이고 유교적인 여성상으로 보는 일반론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것이 근대적 여성 교육론이자 동아시아 근대가 만들어낸 성별 역할분담론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아울러 현모양처 이념은 근대성 비판과 전통론의 부활이라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전통적 여상상으로 재구성되었다는 주장이다. 즉 근대에 발명된 전통이라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현모양처 [Discourse on a wise mother and good wife, 賢母良妻]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이럴 수가. 현모양처는 일제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잔재였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친 우리나라의 공교육에서 나도 모르게 현모양처의 개념이 세뇌되고 있었던 것이었구나. 그게 시작이었겠다. 내가 현모양처의 꿈을 이루지도 포기하지도 못해 괴로워하던 날들은.
1920년대 생인 우리 외할머니. 일제의 교육을 받았던 그녀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유학길에 올랐던 '신여성'이었다. 대하소설 '토지'의 故 박경리 작가님이 그녀의 동기동창이다. 그랬던 그녀의 삶 역시도 결혼 앞에 좌절된 채 평생을 현모양처의 꿈만 꾸다 한 많은 기억만 남기고 가셨다.
어느 날, 외할머니는 내게 그랬었다.
"남자를 만나서 이거 저거 차근차근 잘 물어봐.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돼, 그래야 평생 고생을 안 해. 느그 할아버지 봐봐라, 내가 느그 할배만 안 만났어도..."
얼마 전, 미국에서 혼자 공부하고 있는 동생과 통화를 했다. 박사과정에서 학위를 밟고 있는 그녀는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을 가졌고 오래전부터 나를 잘 따르는 친한 동생이다. 그러다 갑자기 하는 말,
"언니처럼 되는 게 꿈이에요, 예쁜 아이와 남편과 행복하게 사는 현모양처. 근데 아직도 꿈을 못 이루고 있네요" 순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나의 어디에서 현모양처의 냄새가 풍긴다는 것일까. 물론 현모양처 자체가 나쁜 뜻은 아니다. 또한 그녀는 하루빨리 짝을 만나 결혼을 하고 싶다는 표현에 현모양처라는 단어를 얹은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다만 우리 시대의 여성들이 적어도 80년대 초중반에 태어난 대한민국 여성들은 여전히 현모양처를 꿈꾸고 있구나 라는 생각에 잠시 놀랐던 것이다.
일제의 치하 아래 현모양처에 대척하는 개념인 '신여성(모던걸)'은 서구적 퇴폐문화를 맹종하는 '나쁜 여성'으로 둔갑해왔다. 그리고 신사임당은 한 동안 현모양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여성이 되었었다. 어느 날 최고액권인 오만 원권의 모델이 되신 이후 비로소 현모양처보다는 '부'를 상징하는 신여성이 되신 것일 수도. 신사임당 당신은 정작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당신의 이미지가 만족스러우실까. 어느 쪽이 더 나으실지는 모르겠다.
근대에 발명된 전통(?)인 아이러니한 현모양처라는 개념 하에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 모호함과 불합리함 속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현모양처와 신여성 사이 그 어드메가 내가 있을 곳일 것 같다. 찾아야 한다 하루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