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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tto Jun 18. 2021

디지털노마드 비긴즈(출간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인생 제2막, 경단녀 탈출




조금 전 출간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난생처음 출간 계약서라는 것을 본 것도 신기한데 무려 거기에 서명까지 하고 있는 지금이 약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사실 나는 몇 주 전부터 조증 상태에 있었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블로그를 시작하면서였다.

본격적으로 디지털노마드맘이 되겠다고 선언(혼자 마음속으로)을 하긴 했지만 사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막연하게 온라인에다 집을 하나 지어야겠다는 생각만이 있었을 뿐. 하여 요즘 남들이 다 한다는 유튜브도 시작해보고 인스타그램이나 기타 다른 채널도 기웃거려보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죄다 나와는 잘 맞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결국 아주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던 블로그를 꺼내 들었다. 사실 요즘 세상에 어찌 보면 제일 아웃데이티드된 채널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런 면이 나와는 또 잘 맞는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다른 채널에 비해 이용자는 현저히 적지만 사장되지 않았고 대기업이 운영하는 채널이니까. 


캐캐 묵은 블로그를 오랜만에 들어가 보니 웬걸, 생각보다 글이 많았다. 죄다 비공개 일기장이긴 했지만. 그리고 내용을 보니 비공개인 것이 천만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부끄러움으로 넘쳐나는 것들이었다. 대부분이 화가 나거나, 우울하거나, 멘탈이 나가 있거나 혹은 외롭거나, 주로 부정적인 감정일 때 쓴 글들이었고 나에게 글쓰기란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던 듯했다. 제목들도 하나같이 기이했다. 그런 나의 블로그를 환골탈태시켜야 했다.


블로그에 'ㅂ'도 모르는 내가 블로그를 시작하려고 하니 복잡했다. 혼자서는 못할 것 같아서 온라인 스터디 하나를 검색해서 1일 1포 스팅을 30일간 시작했다. 디지털노마드가 되겠다고 시작한 블로그이니 정보성 글을 포스팅했는데 열흘쯤 지나니 글감이 고갈되었다. 결국 밑천이 동이 난 나는 짤막한 에세이를 하나씩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글을 쓰며 몰입하는 느낌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하나 둘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댓글이 달리고 쪽지가 오기 시작했다. 몇 안 되는 이웃의 댓글이었지만 이상하게 힘이 났다. 그렇게 글쓰기를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에 새해 목표에 '책 출간' 한 줄을 넣게 되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은 그때부터였다. 

블로그에 공언하는 일들이 하나씩 모두 다 이루어지는 매직을 경험하게 되는 것.

새해 목표에 '책 출간'이라는 세 글자를 적어 넣자마자 얼마 후 <토글스> 모집공고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1월에 스터디에 들어가 '작은 책'을 하나 쓰게 되었다. 그 작은 책의 글들은 블로그와 브런치에 각각 옮겨두었다. 새해 목표를 2월에 벌써 달성했다는 홀가분함과 함께 다음 목표를 향해 나가려던 찰나에 네이버로 날아온 쪽지 한 통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노마드디토님, 작가님의 블로그와 브런치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싱가포르에서의 삶을 담은 여행 에세이를 하나 기획하고 있는데 저희와 함께 작업하시면 어떨까 하여 제안드립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읽고 또 읽고 반복해서 읽었다.

정갈하면서도 신뢰가 뚝뚝 묻어나는 짧고도 긴 메모에서 한참을 시선을 떼지 못하고 모니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남편이 흔들어 깨웠다.

"왜 그래?"

"어.... 이거 봐봐..."

그리고 그날부터 나의 조증은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어제 오전 출판사 대표님과 계약서 최종본에 서명을 하기 전에 구두협의를 위해 통화를 했다.

인세는 매출의 몇 퍼센트이고 지급 방식은 어떻게 되며 계약기간 및 출간 날짜는 언제인지 등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자니 갑자기 가슴이 뛰면서 순간 극심한 생리통도 잊고 있었다. 인세를 받는다고? 회사와 계약을 했다고? 그것도 글로? 어머 내가?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데 손에 땀이 나서 몇 번을 펜을 쥐었다 놓았다. 얼마 만에 보는 계약서인지.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계약서에 서명을 해 본 것은 다름 아닌 퇴직 서류였다. 그 겨울, 씁쓸한 마음으로 퇴직 서류를 들고 서명을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도 하지만 또 어떤 기억들은 단지 기억만으로도 냄새가 나고 온 몸의 신경들이 솟아나게 한다. 오늘 나는 그 기억을 되살렸고 마치 경단녀가 재취업에 성공한 듯한 희열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나는 3년짜리 계약서에 서명을 마치고 앞으로 내가 보여줘야 할 업무역량에 진액을 쏟을 각오를 하고 있다. 수입이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다. 시작이 반이니까. 마흔이 넘어 시작하는 인생 제2막, '디지털노마드 비긴즈’ 편이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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