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 없는 것
해외생활 난이도 하 중의 최하인 싱가포르에서도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때밀이’.
유독 추위를 많이 타고 겨울이 되면 병든 닭마냥 비실거려 감기를 달고 살았었는데 어쩌다 보니 결혼 후 쭉 적도 부근의 동남아시아에서만 살고 있는 나에게 이 곳의 기후는 일 년 내내 감기 한번 하지 않아도 되는 너무나 안성맞춤인 것이었다. 덕분에 홀로 독박 육아를 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체력적인 한계에 덜 부딪히며 만족도가 높은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딱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매주 뜨거운 물에 몸을 지질만한 대중목욕탕이 없다는 것.
아주 어렸을 적 엄마한테 끌려가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언제부턴가 나는 대중목욕탕을 매우 애호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공중목욕탕에 가야만 있는 '때밀이(우리 집에서는 '나가시'라고 부른다.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우리 외할머니가 늘 '나가시'라고 했고 그의 영향을 받은 엄마도 나도 줄곧 '나가시'라고 하고 있다)'. 특히 성인이 된 후 더욱 그랬는데 직장을 다니던 20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때 밀이를 즐기게 되었던 것 같다. 보통 격무에 시달린 주 후반에는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목욕탕을 찾았다. 목욕탕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벗기도 전부터 나가시 아줌마한테 사물함 열쇠 번호를 알려주고 예약을 건다. 조금은 수고스럽지만 옷을 벗어 차곡차곡 사물함에 개어 넣어두고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한 손에는 챙겨 온 목욕바구니를 들고 입장. 대충 샤워를 하고 뜨거운 탕 안에 들어가 한껏 몸을 지지고 불리고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까만 레이스 팬티와 브라를 착용한 아줌마의 호출 소리가 들린다.
"35번~~~"
그 소리에 탕 안에서 졸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서 곧바로 나가서 침대 위에 눕는다.
누군가의 손에 나의 나체를 맡기는 일이라니(ㅋㅋ). 한참 사춘기이던 시절에는 그것이 쑥스럽고 어색해서 피했던 것 같은데 성인이 되어 누군가의 녹을 받으며 일을 하게 된 후에는 '때밀이 또한 직업이다'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나는 그 용역의 대가를 지불하고 지불한 만큼 최선을 다해 즐기고 싶어 졌다. 그것만큼 단시간에 스트레스를 날려주며 몸을 회복시키는 일도 없었기에.
사실 이 곳 싱가포르에도 칼랑(Kallang) 근처에 가면 일본식 탕이 있는 공중목욕탕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뭐든 비싼 이 곳에서 한국의 찜질방을 생각한다면 언감생심, 규모가 턱없이 작은 것은 물론이며 기대하는 때밀이는 더더욱 없다. 그것보다는 훨씬 고급인 아로마 오일 마사지는 물론 있지만 전 세계의 그 어느 것도 대한민국 전문 때밀이사의 시원함과 상쾌함은 따를 수가 없다. 특별히 큼지막하게 제작된 노랑 빨강 이태리타올을 양 손에 착용하고 출처가 어디인지 언제부터인지 알 길도 없는 겹겹이 쌓여 녹은 눈사람마냥 짜그러져 있는 때 비누를 수시로 묻힌 듯 안 묻힌 듯 스쳐가며 그보다 더 적당할 수도 없는 적당한 압으로 몸의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묵은 때를 벗겨내는 날렵한 손놀림은 가히 무형문화재급이라고 생각한다.
공중목욕탕은 겨울이라는 계절과 참 잘 어울린다.
추운 겨울 저녁, 기다란 머플러로 목을 칭칭 감고 하얀 입김을 호호 불면서 종종걸음으로 찾아가는 동네 목욕탕의 맛.
두껍게 껴입고 온 옷가지를 탈의실에서 하나하나 허물 벗듯 벗을 때의 엄청난 수고, 겹겹이 보관함에 쑤셔 넣어야 하는 번잡함, 탈의실에서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시야를 에워싸는 뜨거운 수증기, 목욕을 마치고 나와 다시 한 겹씩 옷가지를 꺼내 입을 때의 끈적거림. 그럼에도 불구, 몸을 정갈하게 하는 일련의 의식을 마치고 건물 바깥으로 나왔을 때 발그스름해진 두 뺨에 닿는, 박하사탕처럼 개운하고 시원한 밤공기. 바깥은 차디차도 몸만큼은 충분히 후끈하게 데워져 있어 든든하다.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임경선> - 좋아하는 것이 이끄는 대로 중 -
작가의 찰진 표현대로 나는 추운 겨울 일련의 의식을 마치고 건물 바깥으로 나왔을 때 발그르스름해진 두 뺨에 닿는, 박하사탕처럼 개운하고 시원한 새벽 공기! 를 좋아했다. 바깥은 차디차도 몸만큼은 충분히 후끈하게 데워져 있어 일주일간 내 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병든 기운들이 싹 달아난 느낌이랄까. 덥디 더운 적도 지방에 사는 나는 종종 이 기분이 그리워 때밀이가 생각나곤 하는데 재미있는 건 자카르타에 살던 때에 바로 이 때밀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하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는 대한민국의 노하우를 고대로 전수받은 현지인 때밀이사들이 있는 살롱이 있는데 그곳의 이름은 '나노 뷰티'. 출산 후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이 곳에서 살았던 나는 매주 '나노 뷰티'에서 몸조리를 했었다지. 현지인들도 한국 아줌마 저리가라 아주 때를 잘 밀더라는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경험담.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목욕탕을 찾아 때밀이를 했던 건 출산 후 6개월 정도가 지난 후였다. 그때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친정엄마와 아이와 함께 목욕탕을 찾았었다. 당시 나는 엄마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때라 목욕탕을 마지막으로 함께 갔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을 때였다. 아이를 키우며 육아에 한참 지쳐있을 때 엄마는 내게,
"목욕탕 가서 나가시 할까? 내가 옆에서 애 봐주고 있을게"라고 했고 그렇게 엄마와 아이와 함께 셋이 집 앞 공중목욕탕으로 향했다. 아이는 난생처음 가보는 목욕탕에서 대야에 물을 받아 신나게 물장구를 치며 놀았고 엄마는 그 아이를 봐주며 나에게 나가시를 받고 오라고 했다. 당시 나는 아이가 시야에서 잠시라도 멀어지면 불안해했고 아이도 엄마가 안 보이면 울어대는 통에 혼자 목욕탕을 간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 못 이기는척 엄마와 셋이 동행하게 된 목욕탕에서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휴식다운 휴식을 취해보았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편안해지는 게 얼마만이었을까.
어렸을 때 엄마와 여동생과 셋이 대중목욕탕에 가면 엄마는 이태리 타올로 나와 내 동생의 몸에서 나오지도 않는 때를 벅벅 밀어댔다. 아프고 싫었다. 그래도 엄마는 연신 가쁜 호흡을 쌕쌕 내쉬며 열심히 때를 밀어댔는데 나는 그때의 숨 막히고 덥고 아팠던 그 기억이 싫어서 한동안 대중목욕탕을 찾지 않았었다. 그리고 사춘기가 되면서부터는 왠지 모를 쑥스러움에 엄마와도 목욕탕 가기를 꺼렸다. 그러면 엄마는 등을 밀어줄 사람이 없어서 대충 밀고 왔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성인이 된 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의 요청을 모르는 척을 했다.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나 아이가 생기고 비로소 내가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엄마와 함께 다시 때를 밀러 가게 된 그날. 이상하게도 전혀 어색하지도 부끄럽지도 않았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비로소 함께 찾은 대중목욕탕이었는데도 말이다. 아줌마의 철면피를 장착해서일까. 아니면 그 사이 엄마를 향한 내 마음의 거리가 한 뼘 가까워져 있었던 걸까.
함께 때를 밀 수 있는 사이란 얼마나 친밀한 사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