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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려보내기.

기억 조각 22.

by 윤제제



한때는 시간이 무척 느리게 느껴졌다. 한참이 지난 줄 알았는데 고작 몇 분이 지나있었고, 하루가 저문 줄 알았는데 뜬 눈으로 맞이한 이른 아침이었다.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느린 하루의 흐름을 온전히 느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주변 소음으로 시간을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시간을 느꼈다. 새벽 다섯 시쯤이면 쓰레기차가 지나가고, 다섯 시 반이면 윗집에서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기다리면 일곱 시 반쯤 청소기 소리가 났다. 문 밖으로 작은 발소리가 타다닥 들리면 여덟 시 반이었다. 발소리를 들으며 무사히 아침을 맞이했다는 것에 안도하고는 했다.

‘밤새 별일 없었구나. 오늘도 하루를 살아냈구나.‘

별 탈 없음에 감사하면서도 창 밖으로 지나치는 누군가가 부러웠다. 계절을, 날씨를, 그저 하루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모두가 힘들었던 팬데믹 시기가 내겐 꽤나 큰 위로였다. 나만 못 나가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은 안정을 찾았으니까.


동행인 없이 처음 집 앞 천변을 따라 산책을 하던 날이 떠오른다. 어느새 봄의 끝자락, 어쩌면 여름의 초입이었다. 보호자 없이 혼자 밖을 나오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다는 것에 벅차올랐다. 나무의 냄새가 나의 행복함이 되고,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위안이 되었다. 스쳐 지나갔던 잡초를 손으로 쓰다듬어보고, 매 시간 탐색을 했다. 아침의 산책로와 점심의 산책로, 그중에서도 어두운 밤의 산책로를 가장 애정했다. 가로등 불빛 밑으로 겹겹이 쌓인 다양한 초록의 나뭇잎이 사랑스러웠다. 가끔은 꽃향기를 따라 정처 없이 걷기도 했다. 문득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면 강의 건너편으로 건너가 또 다른 길을 걸으며 돌아오고는 했다. 그렇게 걷는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최근에 연명 치료 거부 서약을 했다. 호스피스 병실을 이용하지 않고, 의식이 없는 경우 생명 유지 장치를 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한 장의 카드로 돌아온 서약서였다. 병원에서 보낸 시간 덕에 지금의 내가 살아나가고 있지만 다시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는 않아서 한 선택이었다. 요즘은 그 누구보다 마음이 놓인다는 나의 모친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다시 그 고생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아하는 일만 할 수는 없지만, 이왕이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삶을 살고 싶다. 언제나 시작은 늦지 않다는 걸 알았으니까.


기억의 조각은 집에 갇혀 지냈던 날과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던 어느 날에 메모장에 기록된 메모였다. 여전히 아팠던 것으로 많은 특혜를 받으며 지내지만, 이 글을 갈무리함으로써 정말 마무리를 짓는 바이다. 새로운 길을 걸을 준비를 마쳤으니 다시 첫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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