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다람쥐가 물어오는 생명도토리 #33
나는 2003년 1월 16~18일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신세기문명 포럼’에 참석했다. 원래 초대받아 참가하기로 했던 선배 학자가 갑자기 사정이 생겨 내게 물려주셨다.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가 주관한 이 국제포럼에 초대받은 각국 대표들의 면모를 보니 50도 채 안 된 나 같은 소장 학자가 감히 얼굴을 내밀 곳이 아니라 판단되어 정중히 고사했다. 그러나 거듭된 요청을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하고는 겨우 한 달 남짓 남은 기간 동안 새로운 밀레니엄에 걸맞은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내려 고심했다. 턱없이 짧았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나름 열심히 준비한 끝에 나는 ‘Homo symbious: A New Image of Man in the 21st Century’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내 강연은 이튿날 맨 끝에서 두번째였는데 그날 저녁 종합논평에서 모리 총리가 건배사를 하며 내가 제안한 호모 심비우스의 정신을 포럼의 결론 개념으로 삼으면 좋겠다고 제안하는 등 기대 이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는 내가 일찍이 하버드대 고전학과{Department of the Classics}의 캐슬린 콜먼{Kathleen M. Coleman} 교수의 도움을 받아 고안한 인간의 새로운 학명으로 2002년 여름 우리나라에서 열린 세계생태학대회{INTECOL}에서 시민들을 위한 기조강연 시리즈를 구상할 때부터 사뭇 구체적으로 내 마음속에 떠오르기 시작한 이름이자 개념이다. 나는 그 기조강연 시리즈에 ‘21세기 새로운 생활철학으로서의 생태학: 다스림과 의지함{Ecology as the New Philosophy of Life in the 21st Century: Stewardship and Dependence}’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공생의 개념을 보다 널리 알리고자 했다.
생물학은 어느덧 가장 잘 나가는 과학 분야가 되었지만 생물학의 모든 세부 분야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우리나라 모 연구비 지원 재단에서 특별히 ‘첨단’ 과학 분야에 집중 지원을 한다고 하기에 정성스레 지원서를 작성하여 제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심사도 하기 전에 재단에서 그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분이 전화까지 하며 내게 괜한 수고를 했다고 알려주는 ‘친절함’을 베풀었다. 내가 연구하는 생태학은 첨단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심사 대상이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첨단{尖端}의 정의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내 예상대로 그는 대단히 곤혹스러워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첨단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cutting edge’ 혹은 ‘leading edge’라는 영어 표현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첨단이란 말을 우리말사전에 찾아보면 “시대 사조, 학문, 유행 같은 것의 맨 앞장”이라는 정의와 함께 “뾰족한 끝”이란 정의가 내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leading edge’, 즉 앞서간다는 개념보다는 ‘cutting edge’의 뾰족하다는 느낌이 더 깊이 새겨진 것 같다. 그래서 작고 지극히 기술적인 분야가 아니면 첨단과학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오해가 만연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존 그 자체가 위협받는 ‘환경의 세기’에 우리를 이 엄청난 환경의 위기로부터 구해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학문인 생태학이 최첨단의 관심사가 아니라면 무엇이 과연 첨단일까 묻고 싶다. 인류의 종말이 머지않은 상황에서 소위 첨단과학이라 일컫는 그 모든 과학 분야들에 매달리는 게 무슨 ‘뾰족한’ 대수일까?
도쿄 포럼에서 나는 내가 평소 늘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좌우명 ‘알면 사랑한다’와 《논어{論語}》의 한 구절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듯 중국 대표로 온 학자는 아예 ‘화이부동’을 강연 주제로 삼고 21세기 문명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다양한 삶의 주체와 형태를 인정하고 그들에 대해 보다 많이 알기 위한 노력, 즉 생태학과 같은 학문을 통해 우리 모두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현명한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사피엔스를 버리고 이 지구를 다른 생명과 공유하며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공생인{共生人}, 즉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자고 호소했다. 그러자면 나는 무엇보다 우리 인류가 ‘생태적 전환{ecological turn}’을 이뤄야 한다고 설명했다. 인류는 그동안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 등 여러 다양한 전환을 겪었다. 지난 세기말은 단순한 세기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던 순간이었다. 당연히 미래에 대한 구상이 쏟아져 나오던 시절이었다. 기술적 전환(technological turn), 로봇의 전환(robotic turn), 정보의 전환(informational turn) 등 다양한 전환에 대한 생각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나는 매우 당당하게 다른 모든 전환은 조만간 무의해질 것이라고 항변했다. 그 강연에서 나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21세기에는 기후변화, 생물다양성의 고갈, 그리고 치명적인 질병의 대유행 때문에 인간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텐데 다른 전환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역설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20여 년 전 나는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전환은 바로 생태적 전환이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던 것이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다시금 절실해졌다.
2013년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Jorge Mario Bergoglio} 추기경이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나는 은근히 기대했다. 그가 교황으로서 사용할 이름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서 따온다고 밝힐 때부터 어딘가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2019년 그는 ‘하느님, 다른 사람들, 공동체, 그리고 환경에 반하는 행동 또는 태만’을 ‘생태적 죄{ecological sin}’로 규정하고, 이를 천주교 교리에 포함한다고 선언했다. 다 같은 피조물 간의 연대 체계를 끊는 행위는 자연의 상호 의존성 원칙에 어긋나는 원죄다. 2015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을 엮어 발행한 《찬미받으소서》라는 책에는 이 선언의 이론적 배경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시간과 공간도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자연계 자체의 상호작용과 더불어 자연계와 사회 체계의 상호작용을 고려”해야만 생태적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그 옛날 프란치스코 성인은 일찍이 이를 ‘통합 생태론’이라 부르며 수학과 생물학의 언어를 초월해 우리를 인간다움의 핵심으로 이끌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태적 죄를 규정한 지 채 두 달도 안 돼 일어난 이번 팬데믹은 “자연 세계에 저지른 죄는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거슬러 저지른 죄”라는 관점에서 원죄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어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환경 위기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이 힘 있는 자들의 이익 추구 일변도와 사람들의 관심 부족으로 효과를 내지 못했다고 유감스러워한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끔찍한 재앙을 예견하고 통렬한 ‘생태 회개’를 주문했던 것이다. ‘공동의 집’을 함께 돌보기는커녕 자꾸 허물기만 하는 인간은 회개해야 한다. 지구가 걱정스럽다는 사람들이 있다. 천만에. 지구는 살아남는다. 비록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인간이 사라질 뿐이다. 종교가 선해지면 세상을 구한다.
글| 최재천 생명다양성재단 대표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