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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명다양성재단 Feb 08. 2021

기생충이 예뻐 보일 때

하늘다람쥐가 물어오는 생명도토리 #32

최근 몇 달 동안 나는 전례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다. 코로나1 9 사태가 터지고 난 직후 두어 달 동안에는 갑자기 생긴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며 지냈다. 온갖 강연과 회의 일정이 죄다 취소되는 바람에 정말 오랜만에 널널하게 보냈다. 그런데 사실 몸만 여유로웠을 뿐 마음은 더 초조했다. 하루를 거의 30분 단위로 쪼개 쓰던 사람이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니 얼토당토않게 불안감이 밀려왔다. 필경 무슨 할 일이 있을 텐데 잊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함에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하루 종일 달막거렸다. 나는 영락없는 ‘일 중독자(workaholic)’였다. 


그러다가 우리 사회가 점차 바이러스 세상에 적응하면서 나는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주말을 뺀 거의 매일 강연 일정이 잡혀 있다. 2020년 내내 우리는 우리나라 거의 모든 의과대학의 감염내과 교수님들을 죄다 만난 듯싶다. 매일 저녁 그들에게서 그날의 코로나19 현황과 대처 방안에 대해 들었다. 그분들만큼 바쁜 건 아닐지 모르지만 나도 갑자기 바이러스 전문가라도 된 듯 여기저기 불려 다닌다. 지난 3월 국민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제법 길게 진화적인 관점에서 본 팬데믹(pandemic)의 원인과 대응책에 대해 얘기했는데, 그때부터 갑자기 봇물 터지듯 온갖 언론 매체에서 연락이 오고 강연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https://youtu.be/SUNGzNyyd2w

<취재대행소왱> 코로나 같은 전염병은 계속 반복될까? 우린 계속 이런 고통을 되풀이해야 할까?


아이들에게는 종종 ‘개미 박사’로 불리고 학계에는 사회생물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나는 기생충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을 준비할 때부터 기생충 공부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197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대학원 생태학 프로그램에 지원서를 낼 때 나는 자기소개서에 말 그대로 ‘동물의 왕국’에 관한 연구를 하고 싶다고 썼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에 텔레비전이 처음 보급되던 시절부터 저녁마다 방영되던 ‘동물의 왕국’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며 언젠가 아프리카에 가서 기린과 코뿔소를 따라다닐 꿈을 키웠다. 


그런데 부푼 꿈을 안고 도착한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교수들은 한결같이 내게 당신들은 동물의 왕국 연구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모두 동물 연구는 하지만 딱히 그 TV 프로그램에 관한 연구를 하는 게 아니라며 나를 골려 먹는 것인 줄 그때는 나는 몰랐다. 게다가 나는 박사 과정으로 입학했으나 한국에서 생태학이나 동물행동학에 대해 배운 게 너무 없어 수업 내용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그램 주임 교수를 찾아가 나를 석사 과정으로 낮춰달라고 요청했다. 박사 과정에 머물면서 필요한 부분을 보충하면 되지, 그래서 만일 조금 오래 걸릴 수는 있어도 굳이 석사부터 다시 할 이유는 없다며 반려하는 그의 설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끝내 내 고집을 관철시켰다. 


베링해에서 겨울을 나는 북극흰갈매기

그곳에서 빠른 시일 내로 석사를 마치고 동물의 왕국 연구를 할 수 있는 대학으로 박사를 하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마침 알래스카 베링해에서 바닷새를 잡아 가죽을 벗겨 냉동고에 잔뜩 보관하고 있는 교수가 그 바닷새의 몸에 붙어 사는 기생충의 생물다양성과 분포를 연구해 석사 논문을 써보라는 제안을 해왔다. 연구 재료가 이미 냉동고에 있으니 구태여 현장 연구를 할 필요도 없어 빠른 시일 내로 마칠 수 있을 것 같아 수락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동안 알래스카에 가서 더 많은 새들의 사체를 가져다 냉동고에 넣어주었다. 결국 나는 3년에 걸쳐 웬만한 박사 논문 연구를 능가하는 분량의 연구를 수행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다. 실제로 내 석사 학위 논문은 훗날 내가 하버드대에서 쓴 박사 학위 논문보다 더 두툼하다. 


윌리엄 해밀턴 교수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박사 연구를 할 대학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다윈 이래 가장 위대한 생물학자로 칭송 받던 미시건대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 교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1982년 겨울 해밀턴 교수의 초청으로 나는 미시건대가 있는 앤아버(Ann Arbor)를 찾았다. 그 겨울 해밀턴 교수의 집에서 보낸 일주일을 나는 지금도 내 생애 가장 빛나는 순간 중의 하나로 기억한다. 낮에는 학교도 둘러보고 다른 교수들도 만나며 지냈지만 매일 저녁 그의 거실에서 숨소리가 들릴 듯 가까이 앉아 생물의 진화 전반에 걸쳐 나눈 대화는 그야말로 가슴 떨리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대화는 자꾸 어긋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줄기차게 사회성 진화에 대해 묻고 있었지만 그는 너무나 자주 내게 내 석사 연구에 대해 물었다. 그 무렵 그는 이미 기생충학 연구를 하고 있었고 어쩌면 그래서 내게 박사 과정 입학을 허락했는지도 모른다. 이듬해 결국 그는 영국왕립학회 회원으로 추대돼 옥스퍼드대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그가 비록 옥스퍼드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여러 사정상 그리 하지 못하고 하버드대로 진학했다. 


1980년대 초 해밀턴 교수가 기생충학을 전혀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기 전까지 기생충학자는 물론 거의 모든 생물학자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기생충은 신중하다”는 명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기생충이 신중하지 않으면, 즉 자신이 몸담고 있는 기주(host)를 무작정 착취하면 결국 스스로 삶의 터전을 망가뜨리는 꼴이라는 논리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이 세상 모든 진화는 공진화(co-evolution)일 수밖에 없다. 해밀튼 교수는 기생충,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병원균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기생생물(parasite)이 이 지구생물계에 성(sex)을 탄생시켰다고 설명했다. 기주에 비해 세대가 훨씬 짧은 기생생물은 그만큼 빨리 새로운 유전자 조합을 만들 수 있다. 이런 기생생물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기주생물은 유성생식을 통해 유전자를 섞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조합을 창조해낼 수 있다. 해밀튼 교수는 또 수컷들의 화려한 이차성징들도 기생생물에 대한 강한 면역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그 많은 기생생물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화려한 깃털과 거대한 뿔을 뽐낼 수 있음은 바로 유전적 탁월함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미시건 대학교가 있는 앤아버의 풍경

해밀튼 교수의 그간의 상식을 뒤엎는 창의적인 논문들 덕택에 기생충학은 지금 화려한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지금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진화생물학 분야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들의 절대 다수가 기생생물의 생태 또는 유전을 연구하고 있다. 한때 징그럽고 주변부 주제에 지나지 않았던 기생생물학 분야가 생물학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었다. 이 같은 추세에는 해밀튼 교수가 지적한 성의 진화와 기생자의 관계가 기폭제 역할을 했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기생이 진화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생활 방식이라는 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진화의 속도가 가장 빠른 기생생물은 진화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검증하는 데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실험 재료다. 몇 해 전부터 거의 해마다 어김 없이 발생하는 조류독감(AI), 사스(SARS), 에이즈(AIDS), 그리고 코로나19(COVID-19) 등 전염성 질병들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매번 신종이라는 보도만 보더라도 기생생물의 유전적 변이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나타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결국 해밀튼 교수를 사사하지 못했지만 기생충학이 르네상스를 맞이하던 시절에 공부한 덕에 진화적 관점에서 전염성 질환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석사 논문 발표장에서 나는 기생충 사진을 스크린 가득 펼쳐 보이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정말 예쁘지 않나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학과장님이 “너도 드디어 학자가 되는구나” 하셨다. 나는 가끔 그때 기생충학을 계속했더라면 지금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글|  최재천 생명다양성재단 대표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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