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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명다양성재단 May 23. 2016

생명사랑에 관하여

생명다양성만큼 다양한 생각들 #13



 생명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관심사 중에 하나일 것이다. 자기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기 시작했을 바로 그 순간부터 그것은 이미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에서는 먼저 그 탄생의 신비에 관심을 보였고 종교는 그 소중함을 신성시하였으며 철학과 문학은 그 의미와 본질에 대해서 탐구해왔고, 그리고 과학은 그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규명하는데 진력하였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생명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알게 되었으며 또 얼마나 더 알고 싶은 것인가. 생명에 대해서 좀 더 알아냈다고 해서 우리의 삶에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혹시 생명을 무한히 연장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무엇을 위한 연장인가. 혹시 단순히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거나 막연히 더 살아보고 싶은 욕구 때문만은 아닌가.

 그동안 인류는 생명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의미를 부여하고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였으나 뚜렷하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둔 것이 별로 없다. 종교가들은 생명의 신비를 찬양하고 그 존엄성을 부각시키며 소중하고 겸허한 자세로 살아갈 것을 주문한다. 철학자와 예술가들은 삶의 의미를 극대화하고 그 한계를 의식함으로써 오히려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을 통해서 우리가 생명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거나 죽음이 실제로 극복된 것은 아니다. 대부분 과학자들에 의해서 생명이 어느 정도 연장되고 그 신비의 베일이 부분적으로나마 벗겨졌을 뿐이다.

생명에 관한 과학적 탐구의 시초 히포크라테스

 생명에 관한 관심은 신화나 종교, 혹은 철학이나 예술적 접근보다는 의학이나 생물학적 탐구를 통해서 더욱 생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히포크라테스는 신화의 단계에 머물러 있던 그리스의 생명관을 의술을 통해 경험과학으로 이끌어낸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의술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제대로 알아야 하며 그것은 신화나 철학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실증적이도 경험적인 탐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관한 신화적 혹는 종교적 믿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생명에 관한 본격적인 과학적 탐구는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생명에 대한 관심은 문명이 존재하는 지역에서는 어디에서나 엿볼 수 있다. 동양에서는 대체로 자연 친화적 세계관 속에서 자연 전체를 살아있는 신비한 힘으로 보았다. 이것은 동양에만 있었던 특유한 현상은 아니었다. 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고유한 의미의 생명 현상을 확인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특히 천지인(天地人)의 합일 사상이 강했던 유교적 전통에서는 자연 중심적 관점에서 생명을 중요시하고 인간의 생명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불교에서 많이 사용되는 ‘중생(衆生)’이란 개념은 대체로 생명과 동의어로 쓰인다고 볼 수 있다. 생명은 육체와 정신이 형성되어 생명기관인 명근(命根)이 생겨나고, 수명과 체열과 의식이 작동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중지되면 육체는 더 이상 육체가 아라 시체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이 세 기능 중에 하나라도 유지되면 의식이 없더라도 생명을 지닌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윤회, 즉 끊임없는 헤맴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 기원에 대해서는 대체로 회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동양에 비해서 서양에서는 생명에 관한 입장이 다양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기독교적 창조론으로 수렴된 경향이 있다. 우주의 만물이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보는 정령론이나 물활론은 그리스의 오르피우스교와 이스라엘의 유태교의 영향을 받아 우주가 창조주인 신에 의해 무에서 창조된 피조물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우주는 더 이상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신에 의해서 창조되고 보존되는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피조물이란 어떤 원리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품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창조론은 간접적으로나마 기계론적 생명관에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기계론적 접근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인간의 생명에 대한 기계론적 접근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은 ‘혈액순환론’을 제시한 하비(William Harvey)였다. 코페르니쿠스가 수학적 원리에 따라 별들의 운행을 목적론적 이유가 아니라 기계론적 원인만을 규명하기 위하여 관찰했듯이 그는 다양한 형태로 살아가는 동물들의 생태에 대해 검토하고 그에 관한 여러 관찰을 수집하면서 ‘사실’만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동안 온갖 신비한 생명의 힘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심장은 이제 단순한 하나의 펌프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 사실 다이달로스가 이카로스의 날개를 만들었고 다빈치가 하늘을 나는 기계를 고안했을 때 그 모방의 원형은 새가 가진 날개의 구조였다. 그러나 하비는 오히려 기계의 구조를 통해 인간과 동물의 생명현상을 살핀다는 발상을 구체화하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후에 생물종이라는 것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 진화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다윈의 진화론이 힘을 얻게 된다. 분자생물학의 대두로 생명의 기원과 구조를 분석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가 한층 더 활성화 되었으며 이러한 접근방법을 비판하는 유기체적 혹은 전일론적 주장도 대두된다. 최근에는 이 두 입장의 통합을 모색하는 생물 시스템 이론도 등장하여 생명에 관한 연구가 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었음을 실감나게 한다.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생물은 기나 긴 진화의 과정에서 태양빛을 활동의 에너지로 변환하거나 주위의 물질을 끌어들여서 동화되는 등 소리와 빛과 접촉 등의 자극을 포착하여 적당하게 반응하는 능력을 가지고 환경에 적응해왔다. 생물의 기본적인 기능이란 이러한 에너지와 물질, 정보 등을 변환하고 처리하는 것이고 그 메커니즘의 해명은 생명과학인 생화학과 분자생물학에서 주로 관여해왔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물학자들은 생물 혹은 생명현상을 규정할 때 주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는 ‘물질의 대사’이다. 그것은 어떤 객체가 외부에서 물질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른 물질로 바꿀 수 있는 작용을 말한다. 가령 기본적인 아미노산을 먹고 단백질을 만들거나 복잡한 음식물을 소화해서 간단한 화학물질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둘째는 ‘환경의 대처’이다. 외부 환경이 바뀌었을 때 어떠한 형태로든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그 변화에 반응하는 기능이다. 이것은 고등 동물은 물론 극히 하등 생물인 박테리아나 세균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특징이다.  끝으로 ‘자체의 증식’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유사한 형태의 자손을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재생산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생명현상은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추었을 때 유전자가 사령탑으로서 총괄적인 지휘의 역할을 맡게 된다.  인간의 경우 정자와 난자라는 세포가 서로 만남으로써 생명이 이루어지는데, 여기에는 염색체라는 물질이 들어있는 핵들의 융합을 통해 마침내 세포의 분열을 이루어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결국 60조의 세포가 만들어지고 몸의 조직과 장기들이 생겨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생산되는 것이 생식 세포 하나라는 점, 다시 말해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염색체 혹은 유전자라는 화학물질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l954년에 이 유전자의 구조가 이중 나선으로 되어있다는 비밀이 밝혀졌다. 이 구조의 규명을 주도했던 왓슨(James Watson)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예전에는 우리의 운명이 별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것이 유전자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근거로 영혼의 정체가 밝혀질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최재천 교수가 [과학·종교·윤리]에서 잘 지적해주었듯이 영혼도 결국 물질의 표현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절대 복제되지 않으며 “한 사람의 영혼이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 위에 세상을 살며 터득한 온갖 지식들이 한데 어울 엮어진 산물이기 때문”인 것이다. 

생명현상을 총괄적인 지휘하는 유전자의 이중 나선 구조

 과학기술의 발달로 환경이 파괴되고 생명의 다양성이 훼손되는 현상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것은 생태학자나 환경운동가들만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된다면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는 훨씬 빨리 인류가 멸종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의 대재앙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탄소문명’의 급속한 확산으로 환경이 현저하게 악화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들 각자의 작은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당나귀의 허리를 꺾는 것은 마지막 한 개의 지푸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Jane Goodall박사의 '생명사랑 십계명(The Ten Trusts)'

 생물을 사랑하여 그 다양성을 보존해야한다고 가장 열정적으로 설파하는 사람 중에는 영장류 동물학자인 제인 구달(Jane Goodall)을 들 수 있다. 그는 최근에 발간한 [생명사랑 십계명(The Ten Trusts)]에서 조건 없이 생명을 사랑해야하는 열 가지 이유와 방법을 제시한다. 물론 동물학자이지 환경운동가답게 각종 동물의 소중함을 강조하지만 그의 생명사랑은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을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 “우리가 동물 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기뻐하자.” 그는 특히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도 동물들을 형제와 자매로 묘사하고 따뜻하게 보살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성자는 도살장의 토끼와 양에서부터 길 한복판에서 꾸물대는 지렁이에 이르기까지 많은 동물들을 구했으며, 동물과 새, 물고기에도 설교하고 그들과 의사를 소통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소통을 위해 반드시 언어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 아니 오히려 그것은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둘째, “모든 생명을 존중하자.”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생명의 그물 속에서 모든 동식물은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그는 부각시킨다. 우리는 흔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사고와 어떤 종교적 신념 때문에 그들과 우리 사이에 넘을 수없는 장벽이 있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진화론은 그것이 일종의 허구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가령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면 이름에 걸맞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지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을 혹은 그들을 번호나 부호로 확인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셋째, “마음을 열고 겸손히 동물에게서 배우자.” 그들이 노예가 아니라 삶의 동반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어떻게 소통하고 돕는지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관념이나 개념을 공유해야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자. 그리고 나의 얼굴이나 수족이 나의 노예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넷째, “아이들이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도록 가르치자.” 우리가 상처 입힌 자연을 치유하고 돌보게 될 다음 세대를 기르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그는 지적한다. 그것은 단순히 동물 사랑에 그치지 않는다. 동정과 친절을 배우게 하는 인성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기성세대들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데 있어서 분명히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세계는 바로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현명한 생명 지킴이가 되자.” 특히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너무 큰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방법을 강구하자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릴’ 권리를 주었다(1장 26절)는 것은 동시에 그것들을 섬길 의무도 주었다는 뜻임을 그는 지적한다. 그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현명한 ‘지킴이’가 될 수 있다. 과학기술에 의한 생물다양성의 파괴는 다음 세대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범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Martha's Vineyard 습지에 대해 설명해주는  Jane Goodall 박사

 여섯째, “자연의 소리를 소중히 여기고 보존하자.” 살충제나 화학 비료 때문에 사라진 들판의 정원과 야생 동물들을 살려낼 수 없다는 점을 그는 지적한다. 그러나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비명은 광야의 외로운 절규가 되어서는 안 되며, 이제 그가 말하는 [침묵의 봄(Slient Spring)]에서 벌레들과 새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자고 구달은 제안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흔히 두려워하거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랑할 수 없으며,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도우려 하지 않는다. 우리 중 충분한 수가 도움을 줄 때에만 미래에도 늑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져 자손들이 달빛 아래 서서 그 울음소리를 듣게 되리라.” (바다출판사, p. 162.) 어떤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나의 일부가 된다는 뜻임을 염두에 두자.

 일곱째, “자연을 해치지 말고 자연으로부터 배우자.” 배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자연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가령 동물의 배설물로부터 맑은 눈동자까지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 고호도 그의 [서간집]에서 가징 잘 아는 방법은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여덟째, “우리 믿음에 자신을 갖자.” 무엇보다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함을 그는 강조한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움직인다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난관과 대적하고 극복할 용기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관심이 얼마나 무서운 파괴를 조장하는지 절감할 필요가 있다. 특히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채식주의를 권장하기도 한다.

 아홉째, “동물과 자연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돕자.” 홀로 묵묵히 힘든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야말로 위대한 사람이라는 점을 그는 강조한다. 그들은 동물과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일하면서 그러한 법규나 조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들을 지원하고 그 이념과 활동에 참여하자고 그는 역설한다.  직접 참여하는 것이 여의치 않더라고 그들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도울 수는 있는 것이다. 

 열째,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희망을 갖고 살자.” 무엇보다 그는 생명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아직 너무 늦지는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직도 세상을 옛날 모습으로 되돌려 놓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호소한다.

밀렵으로 시장에서 불법 거래되고 있는 아기 원숭이

 릭의 대답은 이랬다. “글세요. 우연히 조조의 눈과 마주쳤는데 사람의 눈과 똑같지 않겠어요? 마치 ‘나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나 역시도 고통받는 동물들의 눈에서 도와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자주 보았다. 아프리카의 시장에 묶여 있는 고아 침팬지의 눈에서, 높이와 너비가 2미터도 되지 않는 좁은 우리에 갇혀 밖을 내다보는 어른 수컷 침팬지의 눈길에서, 다르에스살람의 해변에서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의 눈빛에서, 시멘트 바닥에 묶여 있는 코끼리의 눈빛에서, 그리고 브룬디에서 자행된 ‘인공 청소’ 과정에서 가족들이 사살되는 것을 본 어린  이들의 눈빛에서 그런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과 동물들은 우리 주위에 어디에나 있다. (pp. 240-241)

 제인 구달의 생명사랑은 매우 감동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오랜 기간에 걸친 그의 체험과 성자를 방불케 하는 폭넓은 인간애에 근거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너무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요소가 많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르침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생명사랑의 지침을 제시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실천적으로나 심정적으로 그를 동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얻게 되었다. 인류는 마치 성(性)의 신비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아낸 사춘기의 청소년과 같은 입장이 되었다. 호기심의 충족을 위해 혹은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서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곤경에 처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가령 우리는 생명의 비밀을 알면 영생할 방법도 터득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지만, 왜 우리에게 영생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다. 그것은 항상 막연한 사춘기적 소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철학자 L. Wittgenstein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은 [논리철학 논고(Tractatus-Logoc Philosophicus)]에서 인간의 영생은 어떤 방식으로도 보장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하며, “도대체 내가 영생한다고 해도 삶의 수수께끼가 풀리겠는지”를 묻는다. 영생한다고 해도 그것은 현재의 삶과 같은 것이며 여기서 생긴 문제는 시공을 넘어서기 때문에 “자연과학”의 문제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게놈 프로젝트에 의해서 생명의 신비가 어느 정도 해명되더라고 삶의 수수께끼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문제는 답변을 마련하는데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소멸에 의해서 해소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의 소멸은 우리가 제기한 문제가 얼마나 의미있는 것인지 철저하게 비판적으로 검토함에 의헤서만 가능하다. 생명에 대해서도 우리는 어느 정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 어느 정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엄정식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

한양대 철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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