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꽃을 피웠다는 도시를 온전하지도 않은 1박 2일 만에 섭렵하겠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다. 나중에 Sophy가 계획보다 하루 늦은 항공권을 사는 바람에 하루가 사라졌다고 고백했지만, 하루가 더 생겼다 한들, 여행지가 어디인들 1박 2일 동안 무언가 대단한 보람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그래서 우리의 여행은 사전답사의 기분으로 다녔다. 누구나 찍고 오는 그런 곳을 일단은 나도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언젠가 나중에 다시 올 때는 전혀 낯설지만은 않은 곳에, 지난번에 봐 뒀던 곳을 다시 오겠다는 마음을 품는 편이 훨씬 부담이 덜하다.
그래서 도시마다 이것은 꼭 해 보자라는 것들을 꼽았다. 피렌체에서는 단연 우피치 미술관이 1순위. 그리고 두오모 성당, 미켈란젤로 언덕과 베키오 다리 등이다. 아, 티본 스테이크도 빼놓을 순 없다.
시차 적응도 어려운 아침의 피렌체. 파란 하늘 배경의 찬란한 풍경을 보니 시차 적응 같은 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우피치 미술관은 사람들의 추천이 자자한 가이드 투어를 이용했다. 가이드 투어가 아니라면 입장권 구매도, 경로 설정도 알아서 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고, 미술관 안에서도 그저 "우와~ 그림 많다~"하고 기억에 남기기도 어려운 산책만 했을지도 모르지.
프라 필리포 리피의 성모와 아기 예수와 두 천사. 아름다운 화풍은 제자인 보티첼리에게로 이어진다.
우피치 미술관의 대표작인 보티첼리의 봄
역시 대표작인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 원근법 얘기에 자주 등장하는 그림이다.
카라바조의 바쿠스. 저 농염한 표정과 강렬한 대비를 보라! 사람들이 어찌 매혹되지 않겠는가.
엄친아 꽃미남 라파엘로의 자화상. 그게 독이 됐는지 젊어서 삶을 마감했다.
역사적 미술가들의 작품 사이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그림이 있었는데, 구약 성서에 나오는 유디트(Judith)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적장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순간을 그린 그림인데, 잔인함을 넘은 생생한 묘사에다, 강렬한 명암 대비는 감정을 뒤흔드는 힘이 느껴졌다. 이제 막 유럽 미술사를 좀 알게 되었다고 보자마자 "역시 카라바조!"라고 아는 체를 했다가는 낭패. 이 그림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라는 여자 화가의 그림이다. 어린 시절 남자들에게 겪은 고초 때문에 그 감정이 그림으로 표출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카라바조풍의 그림에 능한 화가라 그녀도 비슷한 느낌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그림을 본 후 카라바조의 유디트를 보면 뭐 이런 밋밋한 그림을 카라바조가 그렸나 싶을 정도로 이 그림의 인상은 엄청났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그림 유디트. 화가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 그림에 더욱 감정이 이입된다.
그리 충분치 않은 피렌체의 일정에서도, 우피치 미술관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아는 것 없던 와중에도 잘 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우피치 미술관 앞 시뇨리아 광장의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조각상.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다비드상이 눈에 들어오질 않을 정도.
피렌체에서 빠질 수 없는 두오모 성당
천국의 문. 대홍수 때 떠내려 간 조각들을 시민들이 다 찾아왔다는 놀라운 이야기도 있다.
나와 Sophy의 여행은 으레 모두 Sophy의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 피렌체와 티본 스테이크의 상관 관계도 이전에는 몰랐지만, Sophy가 여기서는 꼭 티본 스테이크를 먹어야 한다고 해서 따라간 것뿐이다.
약간 투박한 비주얼과 질감에 기대에 비해 조금 실망했지만, 거대한 크기만은 인상적이었다. 고기를 다 먹어갈 즈음 고기에 웬 옷에나 박혀 있는 플라스틱 태그 조각이 나오지만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두툼한 고기가 놀라웠지만, 품질은 서민적이었다랄까.
Sophy의 계획에 따라 뜨거운 햇빛을 맞아가며 버스를 타고 언덕을 올라갔다. 미켈란젤로 언덕이라 불리는 곳. 조금씩 붉은빛이 도는 하늘을 배경으로 피렌체를 내려다보니, 이것이 과연 피렌체를 다녀온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풍경이겠다 싶다.
피렌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를 풍경
마음을 편히 먹고 가볍게 다니자고 했건만, 언제나 의욕은 이성을 앞선다. 숙소 근처로 온 우리는 첫날부터 욱신거리는 종아리를 주무르며, 눈앞에 보이는 뭔가 있어 보이는 성당은 이름만 찾아봤을 뿐, 다음에 오려니 하고 바라만 보고 말았다.
'성당이 아담하고 예쁘네'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무려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마키아벨리 등등 인류 역사의 위인들이 묻혀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이었다.
저녁 식사도 추천을 받았던 스테이크 집은 뒤로 하고, 동네 슈퍼마켓에서 소박하지만 이탈리아의 맛이 듬뿍 담긴 먹거리를 주섬주섬 담아 와서 호텔방에서 먹었다. 차림새는 볼품이 없었을지 몰라도, 어디 서울의 이태리 레스토랑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던 저녁 식사였다. 지금이야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보면 먹을 수 있는 부라따(Burrata) 치즈를 처음 먹었던 그 감동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호텔방에서 초라하게 차려 먹은 무화과와 프로슈토, 부라따 치즈. 플레이팅만 잘하면 고급 음식점 메뉴겠다.
부라따 치즈에 대해.
이날 처음 먹었던 부라따 치즈는 너무나 감동적이었던 나머지, 앞으로도 이탈리아에서의 저녁에 자주 등장했다. 지금(2020년)은 서울의 트렌디한 레스토랑에서, 또는 수입 식품을 많이 가져다 놓은 식료품점에서 가끔 볼 수 있어서, 그때마다 사서 그날의 감동을 재현해 보려 했지만, 결코 그 느낌이 나지 않는다.
기분 때문만은 아니다. 이탈리아에서 사 먹던 부라따 치즈는 항상 녹색의 포장재에 얹어져 있다. 다른 치즈와는 분명 차별화된 상품임이 극명히 드러났다. 가격도 유난히 비싸다. 녹색의 끈으로 묶인 복주머니 모양의 치즈는 방금까지도 손으로 주무르고 있었던 듯한 비주얼이다.
호텔방으로 들고 와 포장을 풀었을 때, 먹을 때마다 아주 미묘한 차이들이 있었지만, 항상 처음 파고드는 것은 쿰쿰한 냄새였다. 치즈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이 치즈는 모짜렐라 치즈와 같은 프레시 치즈다. 쿰쿰한 냄새는 금세 적응이 되어 못 느낄 정도로 미미하다. 그리고 흥건하다. 뭘 어떻게 먹어야 될지 고민될 정도로 질퍽하고 날것의 질감을 반짝거리며 뽐낸다.
우리는 그냥 손으로 뜯고 찢어서 그릇에 볼품없게 흩어놓고 먹었다. 포크로는 집히지 않아 손으로 집어 먹었다. 색깔만 아니라면 해삼 내장이라도 집어 먹는 듯한 모습이다.
그렇게 입에 들어온 치즈는 세상없는 신선하고 고소한 우유 크림의 맛을 뽱!하고 터뜨렸다. 심지어 쫄깃하기까지!
이런 치즈가 먼 타국에까지 와서 그 맛과 느낌을 온전히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혹시라도 아직 이탈리아에서 부라따 치즈를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꼭 맛을 보시길.
가게 주인에게 얘기할 때는 "부ㄹㄹㄹㄹㄹㄹㄹㄹ라따"라고 혀끝을 아주 찰지게 굴려줘야 금방 알아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