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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예히 Aug 25. 2024

0.4성급 호텔에서의 하룻밤

함께라 웃을 수 있었던


일주일간 이키토스에서 적응기간을 보내고, 페루의 수도인 리마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이 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가. 한시라도 빨리 수도인 리마로 나가서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아침부터 준비를 서둘러 공항으로 이동했는데…


우리가 탈 비행기가 결항이란다. 아니, 이렇게 화창한 날씨에 웬 결항? 우린 따로 연락받은 것도 없었으며, 어떠한 설명도 들을 수 없었다. 설마 아니겠지, 다른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에 기대어 일단 항공사 카운터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줄어들지 않는 줄….  그래, 이곳은 남미였다!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지만 뼛속부터 한국인인 나는 혼자 속이 터졌다.


CANCEL 된 우리의 비행기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리 차례가 왔다! 우리는 오늘 탈 수 있는 다른 항공편이 있냐고 물었다. 직원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시간대의 비행기는 남는 자리가 없으며, 내일 이 시간에 비행기가 뜰 것이니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호텔에서 하루 더 머무르며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정말 망연자실이다. 나는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데 하루 더 머물라고?! 하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도 없었기 때문에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생떼를 쓴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빨리 체념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더 이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또 무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직원은 10분 정도 있으면 호텔차량이 픽업을 온다고 했지만, 10분은 어느새 1시간이 되어있었다. 이키토스는 정말 덥다. 이 날 따라 날씨는 어찌나 맑은지 에어컨도 없는 공항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땀범벅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 이런 상황을 혼자 겪었다면 굉장히 우울했을 테지만 다행히 내 옆에는 함께하는 좋은 동료들이 있었다. 성격들도 어찌나 좋은지 다들 착하고, 밝고, 긍정적이라 다행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 하나 목소리를 높이거나 짜증을 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동생들과 나는 웃긴 사진을 찍거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공항에서의 무한 기다림


앉아있는데 문득 제공해 주는 호텔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공항 카운터로 가서 우리가 갈 호텔의 이름을 물었고, 우리는 곧장 구글에 호텔이름을 검색했다. '사마리아 정글 호텔' 이름에 정글이 들어가다니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막상 검색해 보니 4성급에다 수영장이 딸린 곳이었다! 우리는 잔뜩 기대어 부풀어 수영복도 없는데 무슨 옷을 입고 수영을 할 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며 무료 호캉스나 즐기자고 웃기도 했다. (한 치 앞도 모르고...)


한참 후에 드디어 우리를 태우러 픽업 버스가 왔다. 이키토스에서 툭툭이가 아니라 버스라니! 벌써부터 예감이 좋았다. 버스를 타고 호텔로 이동하는 약 30분간 달콤한 낮잠도 잤다. 왠지 기분이 좋았다. 


잠시 후, 호텔 입구에 내리자마자 다시 불길한 기운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생각한 4성급 호텔의 외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체크인을 기다리는 것도 한참이 걸렸다. 분명 우리가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12시였는데 어느새 시간은 오후 5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한참 후 체크인을 하고, 객실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가방만 두고 손으로 코를 막으며 얼른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악취가 말도 안 되게 심했기 때문이다. 객실 내부가 눅눅했으며, 하수구 냄새 같은 것이 진동을 해서 방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방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의 객실도 마찬가지로 냄새가 심했다. 우울해진 우리는 우선 배가 고프니 호텔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체크인할 때, 호텔에서는 오늘 점심도 제공이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오후 5시에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상하지만 5시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호텔 식당으로 가는 길에 결론을 내렸다. 이곳은 4성급 호텔이 아니다. 0.4성급 호텔이었다. 식당의 식탁보에는 개미떼가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으며, 수영장 물에는 이물질이 많아 물놀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배가 고팠기에 앉아서 소고기 스테이크를 주문했고, 질겨서 고기는 거의 못 먹고 밑에 깔린 감자튀김을 남김없이 먹었다. 


질겼던 소고기 스테이크


저녁까지 먹은 우리는 방에 들어가기 싫어서 머리를 맞댔다. 이대로 호텔 로비 소파에서 다 같이 쪽잠을 잘까? 싶기도 했다. 악취 나는 방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호텔 측에 객실 교체를 요구해 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 셋은 직원에게 가 방에서 악취가 너무 심하게 나니 방을 옮겨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난처한 표정의 직원은 1인실은 없지만 3인실이 있으며, 우리가 같은 방을 써도 상관없다면 그곳으로 옮겨줄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우리는 1인실이든 2인실이든 3인실이든 상관없었고, 방을 옮길 수 있다는 사실에 신나 당장 짐을 싸서 방을 옮겼다.


옮긴 객실도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고, 여전히 어디선가 악취가 났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혼자 겪는 거보다 한 공간에서 나누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듯했다. 냄새나는 방에 혼자 있었다면 금세 우울이라는 감정이 나를 덮쳤을 거다. 하지만 함께 있으니 왠지 웃음이 나고, 즐겁기도 했다. 언제 또 이런 이상한 경험을 해보겠는가!


우리는 어느새 우리들만의 방식으로 고통을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유튜브와 연결되는 TV로 K팝을 틀기 시작했다. 역시 힘들 때는 K팝이다.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 우리는 걸그룹에 빙의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다. 


신나는 걸그룹 음악


중간중간 나는 악취가 인상을 찌푸리게 했지만 괜찮다. 나는 함께 노래를 부르며 몸을 흔들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이고, 우린 지금 웃고 있으니까! 이 날은 정말 이상하게 흘러간 하루였지만, 그래서인지 어쩌면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루가 된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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