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이틀 전
11월 1일. 내가 살던 호주에서는 이제 여름의 시작이었고 한국에서는 겨울을 준비하는 단계였다. 오랜만에 나는 그리웠던 집에 도착했다. 어두운 밤, 차가운 아파트 창문으로 따스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온 가족이 오손도손,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가득한 개떡을 씹으며 최근에 가장 핫한 드라마를 볼 거 같았다. 가족을 실제로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혹시나 이산가족처럼 서로를 안으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며 대문 비밀번호를 눌렸다.
띠리릭~
문이 열렸다.
"나 왔어!"
"미친놈아! 지금 밤 10시야! 조용히 안 해!?"
딱히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보는 누나의 첫 말이었다. 다행히 정이 없는 사이다. 그래서 실망하거나 상처 받지는 않았다. 누나의 모습은 여전했다. 유행을 타지 않는 검은색의 안경과 평범한 묶은 머리. 다만 옷 스타일이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항상 아빠 패딩만 입고 다니던 인간이 하얀색 스웨터를 입고 있다니. 이제 어디 가서 욕은 안 먹겠구나 싶었다.
"아빠~ 이 새끼 봐봐. 반바지에 반팔이야. 너 진짜 미쳤냐? 안 추워? 감각 없어?"
한국에 오기 전, 대만에서 1달 정도 여행하느라 케리어에는 전부 여름옷만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상관은 없었다. 애초에 나는 추위를 잘 타지 않았다. 상체는 따뜻하게 해도 하체는 항상 반바지를 고집했다. 심지허 군대에서도 활동복 긴바지를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왜냐고 묻는다면 편하다고 밖에 말을 못 하겠다.
누나는 그렇게 욕을 하면서 나의 짐을 들어줬다. 그리고 안방에서 아빠가 슬그머니 나왔다. 아빠 또한 여전했다. 흰머리, 검은색 운동복 세트, 팔자걸음. 그리고 오른손에는 엄마의 성경책이 들려 있었다.
"어, 그래. 이제 왔냐? 고생 많았다. 저녁은?"
"저녁이요? 한국 오면 제일 먹고 싶은 걸로 사 왔어요. 이거요. 떡볶이."
호주에 살면서 틈만 나면 떡볶이를 만들어 먹었다. 외국인 친구들이 한국음식 중에서 가장 먹고 싶은 음식 중에 하나가 떡볶이라서 만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중에 하나다. 항상 만들어 먹으면서 허전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순대와 튀김. 이들이 없는 조합은 속 빈 강정과도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1년 만에 난 완벽한 조합의 음식을 먹게 됐다.
포장을 뜯으니 모락모락 연기가 올라온다. 침이 고인다. 시야가 좁아지며 세상엔 나와 오직 떡볶이, 순대, 튀김만이 존재한다. 나만의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면 떡볶이소스에 오징어 튀김을 담가놓고 그 위에 소금 살짝 찍은 순대를 위에 올린다. 그런 다음 숟가락으로 떠서 입을 자연스럽게 눈이 감길 정도로 벌림과 동시에 입으로 넣어 버린다. 많이 씹기보단 최대한 맛을 음미한다. 두 음식이 조화를 이루게 식도로 넘긴다. 그리고 눈을 뜬다. 시작이 반인 것처럼 처음에 이렇게 먹으면 마지막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물론 위 사항은 나에게만 적용될 것이다.
그래 이 맛이야! 입이 바빠 속으로 외쳤다. 그런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으휴, 돼지새끼. 호주로 다시 갈 때 되면 너무 뚱뚱해서 비행기 표 2자리 예약해야 되는 거 아냐? 아, 그때까지 뭐 할 거야?”
“일단, 21일에 인도네시아 친구가 허니문 오거든. 그래서 내가 가이드해주기로 했어. 근데 허니문을 한국말로 뭐라고 했지? 결혼여...... 아닌데...... 그...... 뭐냐...... 아! 결혼신혼. 아니, 신혼여행! 와, 이제 한국말이 기억이 안 나. 신기하지 않아?”
“지랄하네.”
“ 그리고 친구 오기 전까지 국토대장정이나 하고 오려고.”
누나는 내가 영어로 말한 건지 아니면 자신이 들은 게 맞냐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표정에 순간 내가 영어로 말했나 싶었다. 하지만 나는 ‘국토대장정’을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몰라서 그건 아니구나 싶었다.
국토대장정. 언제부터 생각했는지 모른다. 다만, 나는 이것을 반드시 해야겠다는 다짐이 내 안에 박혀 있었다. 뭔가, 지금 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느낌. 지금. 당장.
나는 누나가 들은 게 맞아 라는 표정으로 누나에게 고개를 2번 끄덕였다. 그제야 누나는 어이가 없었는지 혀를 차며 달력을 가리켰다. 11월. 그래. 11월이다. 이제 곧 겨울. 하지만 아직 겨울은 아니다. 아직 추위라는 변명 아래 할 수 없는 도전은 아니다.
“아빠~ 이 새끼, 국토대장정 한데! 야! 그거 하려면 보통 한 달 잡고 해야 되는데, 네 친구 20일에 온다며. 그리고 집에 텐트랑 뭐, 이것저것...... 아, 아무튼 있냐?. 그거 언제 준비해서 출발할 건데. 뭐 계획한 거라도 있어? 준비물은? 필요한 게 뭔지는 아냐?”
“걱정 마, 다 알아봤고 필요한 건 사기만 하면 돼.”
거짓말이다. 폭풍처럼 쪼아대는 바람에 일단 완벽하게 계획한 척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간다고만 마음을 먹었지 전혀 준비된 것도, 알아본 것도 없었다. 그저 보통, 사람들이 땅끝마을에서 시작하거나 도착하니까 일단은 그곳으로 가야겠구나 싶었고 그다음엔 내가 사는 곳에서 남으로 내려갔으니 북으로 올라오면 되겠구나 싶었다.
막장이다. 나도 안다. 하지만 이런 게 나 다움이다. 예전에 라섹수술을 했을 때에도 그 전 날에 생각해서 그다음 날 수술하러 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년 동안 고민하는 이 문제를 난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운 좋게 남들보다 수술이 잘 돼서 후기까지 남기는 쾌거를 이뤘다.
나는 이 짧은 대화 중에 내일 필요한 물품을 사고 내일모레 출발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내일모레 출발할 거야."
“그래서 뭐 살 건데?”
“텐트랑 배낭, 그리고 침낭. 음, 그리고......”
“오케이, 거기까지! 내가 사줄게.”
“진짜?”
“그래, 인터넷이 싸니까 인터넷에서 사. 내일까지 물건 받으려면 지금 사야 돼. 여기서만 로켓 배송 있으니까, 여기서 보고 사. 아~씨! 빨리 골라 시간 없으니까!”
얼떨결에 바로 사게 되었다. 일단 배낭부터 골랐다. 왜 가방의 크기 표시를 (L)로 사용하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패션이 가장 중요했으므로 베이식 색, 45L 배낭을 골랐다. 가격이 40,260원이라서 구매확정을 빠르게 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침낭을 검색했다. 겉은 블랙에 안은 화이트인 침낭을 상상했다. 그런데 딱 내가 생각하던 스타일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건 보지도 않고 바로 구매했다. 웃긴 건 배낭보다 비싼 가격이 44,870원이었다.
마지막으로 텐트를 알아봤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가격들이 너무 비쌌다. 누나는 가격 같은 건 따지지 말라고 했다. 미안하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좀 많이 따지는 편이었다. 1인용 텐트면 좀 싸지 않을까 싶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야, 너 텐트는 칠 줄은 아냐? 못 치면 원터치로 사.”
“에이~ 그거 못 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게 나다. 그렇게 말하면서 검색 창에 ‘원터치 텐트’라는 단어를 만들고 있었다. 원터치 텐트가 과연 무엇일까. 뭔가 버튼을 누르면 알아서 펴지고 한 번 더 누르면 알아서 접히는 자동우산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뒤에서 누나의 한숨소리를 들었지만 못 들은 척을 했다.
원터치 1인용 텐트를 보았다. 하지만 1인용 텐트들은 전부다 난방용으로 실내에서만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2인용 텐트를 보는데 누나가 이왕이면 큰 걸로 사라고 했다. 나중에 가족끼리 캠핑 갈 때 사용할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3~4인용 원터치 텐트를 봤다. 그중에 접어놓은 상태가 원형으로 된 게 있었다. 바로 구매 버튼을 눌렸다. 가격은 말도 안 되게 싼 34,650원. 총 고르는데 걸린 시간은 결제까지 15분. 돈은 약 12만 원. 숫자들이 3의 배수라서 마음에 들었다.
“됐어. 나머지는 내일 나가서 사고 다 쳐 먹었으면 정리하고 자.”
그러고는 누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우리를 보던 아빠는 국토대장정을 가는 게 대단하다며 칭찬과 같이 걱정해 주셨다. 그리고 아빠는 화장실을 잠시 들렸다 방으로 들어가셨다. 빈 그릇을 정리하고 나도 내 방으로 들어갔다. 뭔가 순식간에 지나갔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