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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디 준비는 완벽하길.

11월 2일, 하루 전

by 전용호

눈을 떴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나의 방. 내가 떠난 이후로 이 곳은 시간이 멈춰 있었다. 내 방의 물건들은 나의 손길로 생명을 불어넣어야만 움직인다. 내가 올 때까지 그들은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먼지가 가득한 방에서 내가 잔 건 아닐까 싶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먼지 하나 없었다. 아마 깔끔한 아빠가 매일 청소를 했을 거다. 역시 우리 아빠다. 난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방을 나왔다.


아무도 안 보였다. 닫힌 방들을 노크해봤지만 정적만이 날 반길 뿐이었다. 다들 직장에 가 있었다.


지금 몇 시일까. 핸드폰을 켰다. 오전 11시였다. 늦은 감이 있지만 한국의 아침 향기를 맡으러 대문 밖을 나갔다.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음~ 공기 한 번 좋다~”



사실 아무 향도 나지 않았다. 단지 숨을 들이켤 때마다 콧구멍을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뿐. 하지만 이 느낌이 좋았다. 하루를 자고 일어났다는 건 이곳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쓸데없는 이 의미가 지금의 느낌을 한층 더 실감 나게 해 줬다. 하지만 조금만 더 지금의 느낌을 생기 있게 살리고 싶었다.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아! 커피 한잔이다. 새하얀 컵에 검은 아메리카노를 담아 천천히 마셔야겠다. 컵은 나의 미래고 아메리카노는 나의 위기라 정하자. 나는 완벽하지 않기에 언제나 위기와 함께했다. 처음의 위기를 피하면 언제나 다른 위기가 가 몰려왔다. 그리고 그 다른 위기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인도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항상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 빠트렸다. 수많은 혹한의 경험을 통해 난 처음의 위기를 고개 빧빧히 들고 맞서기로 했다.


그러기에 검은 아메리카노를 다 마셔버릴 테다. 새하얀 컵만이 존재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검은 물은 흉터처럼 남는다. 그건 나의 경험이고 나의 성장 판이라 부르자.


완벽한 구상이다. 나는 곧바로 주방으로 갔다.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잡동사니로 난장판이었다.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더욱더 난장판이다 못해 왜 있는지 모를 역사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새 번째 서랍을 열어보려다 삐져나온 노란색 봉투와 검은색 비닐들의 아름다운 조화를 보고 다른 곳을 뒤졌다. 주방을 다 뒤져 봤지만 믹스커피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세상에 커피 없는 집이 어디 있어?”



완벽했던 구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까 외면한 새 번째 서랍을 열어봤다. 봉투만이 가득할 줄 알았던 그곳에 따뜻하게 마실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바로 쌍화차.


그래, 이거라도 마시자. 난 쌍화차를 따뜻하게 대펴 다시 대문 밖을 나갔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의 현실에 어이가 없었다. 옆에 쌓여있는 박스에 앉았다. 쌍화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맛있다. 생각보단.


아, 이 또한 어떠하리. 한국에서의 첫 아침이지만 사실 첫날은 아닌 것처럼, 아침의 티타임이지만 사실 아침은 아닌 것처럼, 원하는 데로 돌아가진 않았지만 사실 행복한 것처럼. 부정 속에 긍정을 찾았을 때 난 또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다.


바로 박스들이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있어서 의식하지 못했었다. 박스들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박스는 총 2개였고 박스 뒤로 기이할 정도로 크고 알 수 없는 동그란 무언가가 있었다.



“아, 설마. 벌써? 진짜?”



일어났다. 박스에 붙여있는 상품명을 봤다. 두 박스 중 하나는 배낭, 다른 하나는 침낭이었다. 아무리 한국인이 빨리빨리를 외쳤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오나. 그렇다면 앞으로 10년 뒤, 20년 뒤에는 얼마나 더 빨리 물건을 받을 수 있을까. 만약에 주문을 하자마자 바로 받는 단계에 이른다면 우린 얼마나 진보된 문명에 서 있게 되는 것인가. 그런데 왜 박스가 2개일까. 텐트는 왜 안 온 걸까.



“아, 설마...... 이게? 진짜?”



박스 뒤로 기이할 정도로 크고 알 수 없는 동그란 무언가에 붙여있는 상품명을 봤다. 텐트였다. 저 기이할 정도로 큰 알 수 없는...... 아니, 이제는 알 수 있는 동그란 무언가가 텐트였다. 박스 2개보다 컸다. 그것도 훨씬. 저 두 박스 중 하나가 배낭일 텐데.


살면서 저 텐트보다 큰 배낭을 본 적은 없지만 혹시나 공장에서 실수로 기하학적인 크기의 가방을 만들고, 실수로 완제품으로 포장을 했고, 실수로 배송을 하지 않았을까.


박스를 오픈했다. 마치 내가 실수로 저 텐트를 구매한 것처럼. 박스 안에는 사진에서 본 그대로의 예쁜 베이지 색의 배낭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조심스럽게 가방을 꺼냈다.



“아......”



말문이 막혔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사자성어 같았다. 평상시에 매고 다녔던 가방보다 작은 배낭이었다. 내가 항상 큰 가방을 멘 것인가 아니면 45L 배낭이 원래 작은 것인가.


역발상으로 텐트 안에 배낭을 넣어갈까 생각해봤다. 하루 이틀은 꼴이 우스워 재미야 있을 거다. 하지만 나중에는 재미라는 단어를 잊은 채, 찌질한 욕질을 하며 걷게 될 거다.


배낭은 나중으로 미루고 다른 박스에서 침낭을 꺼냈다. 다행히 내가 생각했던 침낭의 사이즈였다. 블랙엔 화이트. 그리고 내부에 있는 무늬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거 하난 잘 샀다. 만족했다.


하지만 바로 불안해졌다. 배낭과 침낭의 크기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침낭을 배낭에 넣어봤다. 다행히 들어갔다. 하지만 이제 그 무엇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맙소사.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머릿속에 Must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반드시 해야 할 일과 필수품에 대해 생각해봤다.



일단 내일 국토대장정의 시작은 불변이다. 그러기에 반품은 불가능하다. 20일에 친구가 결혼신혼을 오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출발해야 한다. 이를 위한 요건은 땅끝마을 해남으로 가는 경로를 알아보는 것과 짐을 완벽하게 준비...... 가 아니라 상황에 맞게 최소한의 필수품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우선 경로를 찾아봤다. 땅끝마을 해남까지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외버스를 이용했는데 내가 사는 안양에선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서 목포를 경유해야 했다. 버스 시간표를 보니 첫차가 오전 7:20, 그다음 버스는 볼 필요도 없이 무조건 첫차를 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시라도 빨리 출발해야 빨리 도착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다음으로 과연 필수품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폰에 메모장을 열어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지갑(현금, 카드), 스마트 폰, 보조 배터리, 손전등, 양말(5개), 팬티(5개), 옷(상, 하의 2벌씩), 패딩, 수건(1장), 휴지, 물티슈, 버너, 코펠, 식량(라면 4개), 수저, 물(500ml 2통), 모자, 선글라스, 목토시, 텐트, 침낭.



그다음으로 여기서 무엇을 뺄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두 가지 세트로 물건을 뺄 수 있었다. 하나는 음식을 만들어 먹지 않는다면 버너, 코펠, 식량, 수저를 뺄 수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야외 숙박을 하지 않는다면 텐트, 침낭을 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상상하는 국토대장정에는 이 모든 것이 기본이 되었다.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진다면 이번 도전은 그저 시간낭비에 불과해진다. 팥 없는 단팥빵처럼 허전함에 후회할 것이다.


결국 난 단 하나도 빼지 않기로 정했다.


집안에 없던 물건들을 사 왔다. 그리고 최대한 정리를 해서 배낭에 넣었다. 다행히 다 들어갔다. 텐트와 침낭 빼고 말이다. 해결책이 필요했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순간 돈오 했다. 굳이 배낭 안에 넣을 필요는 없다. 그저 이렇게......



띠리릭~


문이 열렸다. 누나였다.



“야, 돌아이. 뭐했냐? 뭐야, 이거? 텐트냐 설마? 어? 진짜 텐트네. 뭐 이렇게 커? 너 어떻게 하냐? 이거 못 갈 필인데?”


“No! 갈 수 있어. 이렇게 매달고 가면.”



내가 배낭을 매자 자기 돈 내고 개그공연을 보러 온 듯 누나는 미친 듯이 웃었다. 웃고 있는 얼굴이 욕망의 항아리처럼 보였다. 꼴 보기 싫었다. 저 짐승이 웃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그 사이에 전화 한 통이 왔다. 상복이었다.



“야, 왔으면 전화를 해야지. 인스타에만 올리냐? 형이 좀 서운해?”

“So~ sorry, Bro. 뭐하냐?”

“뭐하긴, 너랑 술 마시러 가고 있지. 빨리 아지트로 와라.”

“누가 간다고 했냐? 하하. 근데 누구누구 오냐?”

“모르지 너한테 처음 전화했으니까, 일단 모이자.”

“응~ 그려. 너 멋 데로 해~”



전화를 끊었지만 짐승의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무시하고 신발을 신었다.



“어디 가냐?”

“응, 친구들 만나러.”

“술 마시냐?”

“응.”

“미친놈이냐, 진짜?”

"걱정 마, 내일 무조건 출발할 거야."



그렇게 난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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