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여덟째 날
마을을 벗어났다. 흔히 있던 가로등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인도마저 없어졌다. 2차선 도로를 걸었다. 외진 곳이라 갑자기 들이닥칠 차 같은 건 없었다. 마치 드라마 워킹데드 시즌1의 포스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걷는 차도 옆 언덕에는 고속도로가 있는 듯했다. 그곳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작은 불빛과 가끔 지나가는 차들의 굉음이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줬다. 이 도로를 벗어날 때까지 난 그 무엇 하나 보지 못했다. 한참을 걸어 도로에서 벗어났다.
다시 가로등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인도가 생겼다. 인도로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됐다. 걷다 보니 제법 큰 건물이 보였다. 장성호 체육공원이었다.
때마침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들렸다. 나와보니 주차장이 꽤 넓어 보였다. 차들도 어느 정도 주차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 시간에 이 정도의 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게 좀 신기했다. 이런 외진 곳에 주차하고 어디 갈 곳이 있나? 주변에 마을이라도 있었나? 호기심을 품으며 그곳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차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랐다. 빠른 걸음으로 입구로 나왔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게 미친 거지만 차 주인도 나만큼 미친놈일 거라고.
이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지도를 봤다. 문제가 있었다. 산 하나가 있었는데 이 산 때문에 너무 많은 길을 돌아서 가야 되는 상황이었다. 난감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든 상태였다. 최대한 빨리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곡비를 옆에다 두고 나 대신 울어줬으면 싶었다. 지도를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산을 넘어갈 것인가. 검색해보니 약 3시간 정도 차이가 났다. 야간산행을 할까?
정했다. 산을 넘어가기로 했다. 선택은 순간이었다. 뭐 하나하나 따질 시간이 없었다.
산 입구에 도착했다. 넓은 비포장 길이였다. 지도에는 정확한 길이 없어 최대한 북쪽 방향으로 가야 했다. 부디 이 길이 동쪽이나 서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길 바랬다. 산은 생각보다 가파르지 않았다. 걸을 만했다. 다만 어두웠다. 짙은 안갯속에 달빛조차 없었다. 아까 도로를 걸을 때에는 그나마 저 멀리 고속도로에서 빛이라도 나에게 조금은 나눠줬는데 여긴 그 마저도 없었다. 어둠의 향연이다.
손전등을 꺼내 불을 켰다. 조금은 안전하게 걸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다 불안감이 들었다. 만약에 손전등이 고장 나거나 배터리가 다 닳아 버리는 상황이 생기면 어떡하지? 최후의 상황을 대비해 손전등에 불빛을 아끼기로 했다. 불을 끄고 다시 어둠을 맞이했다.
야산은 조용했다. 벌레소리라도 들릴 줄 알았는데 그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가끔가다 소리를 내주긴 했다. 그 소리가 반가웠다. 벌레는 싫어하던 내 모습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지도를 보니 정상적으로 걷고 있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다.
뒤에서 기척이 났다. 멀리서 나는 소리였다. 산 밑에서 들리는 거 같았다. 스윽 멀어지겠지. 하지만 이내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무언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굉음이었다. 바로 자동차 소리. 자동차로 이 산을 타다니 의아했다. 비포장도로지만 길 넓이를 보면 자동차로 충분히 갈만하긴 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자동차로 산길을 가고 있다니 좀 이상했다. 아니 말이 안 됐다. 왜 저 차는 이 길로 오는 거지? 아니면 나에게 오는 걸까? 혹시 마을에서 지나쳐간 현대적인 저승사자일까? 나를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실수로 짐승들을 잡아가서 다시 나에게 오는 걸까? 아니면 혹시 장성호 체육공원에서 시동을 걸었던 그 자동차일까?
의문의 의문이 반복됐다. 그러다 뒤에서 오는 자동차의 불빛이 내 그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국의 슬랜더 맨처럼 기다랗던 그림자는 순식간에 어린아이처럼 짧아졌다.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봉고차였다. 바로 내 뒤에 있었다. 놀라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봉고차는 일정한 속도로 내 옆을 지나갔다. 빨리 가라. 재발 좀 빨리 가라. 그래. 그렇게 가다가 저 멀리 사라져라.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봉고차는 내 앞에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