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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N의 36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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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용호 Aug 23. 2019

그때 그 맛은 어디로 간 걸까.

비빔밥

 “엄마~ 배고파!”


 어릴 적 밖에서 놀다 온 나는 인사 대신 항상 이 말을 했다.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음식을 차려 주셨다. 내가 반찬 투정을 해도 어머니는 아무 투정도 없이 반찬을 만드셨다. 하지만 고기반찬은 없었다. 그때 당시 집안 형판이 좋지 않아 우리 집에선 고기가 귀했다. 가끔 고기를 먹는 날이면 다음 날 친구들에게 어제 뭐 먹었냐고 물어보며 어제 나는 고기를 먹었다며 자랑을 했다. 남들은 매일 먹는 고기반찬을.


 매일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집에 있는 양파 볶음, 깻잎 무침, 멸치 볶음, 어묵 볶음, 콩자반, 오징어채 볶음, 감자채 볶음. 싫었다. 어린 나이에 벌써 지겨워졌고 어린 나이라서 맛없었다. 달달한 소시지 볶음이나 씹는 질감이 살아있는 동그랑땡, 그리고 매콤한 떡볶이를 먹고 싶었다. 하지만 맛있는 걸 먹으려면 누군가의 생일이나 친구네 놀러 가는 게 아니면 불가능했다.


 하루는 울면서 맛있는 걸 먹고 싶다고 때를 쓴 적이 있었다. 달달하고 매콤한 게 너무 먹고 싶었다. 어머니는 철이 없다면서 엉덩이 타작을 하셨다. 그리고 벌로 부엌에서 손들고 서 있게 했다. 어머니는 내가 보는 앞에서 요리를 시작하셨다. 아니 이걸 요리하는 거라긴 보단 무언가를 준비하는 거 같았다. 큰 대야에 뜨끈한 밥을 때려 박더니 집에 있는 반찬들을 죄다 집어넣었다. 거기에 거침없이 고추장을 밀어 넣고 참기름을 뿌렸다. 어머니는 나에게 숟가락 하나를 내밀며 말씀하셨다.


 "비벼."


 어머니와 나는 왼손으로 대야를 잡고 오른손에 숟가락으로 음식을 비비기 시작했다. 처음에 어머니가 화가 나서 음식을 죄다 버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비비면 비빌수록 냄새도 섞이며 고소하고 매콤한, 그리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합적인 향이 났다. 내 코가 취하기 시작했다. 그 취기에 붉게 물든 둔탁한 대야 속 음식들에게서 환상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러다 어머니가 자신의 숟가락으로 내 숟가락을 탁! 치셨다.


 "먹어."


 나는 "네."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입 안에 넘쳐버린 침 때문에 꼴깍 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크게 한 숟가락을 퍼 입 속에 넣었다.


 와, 이 맛은. 욕심을 많이 부렸는지 나물들이 입 밖으로 삐죽빼죽 튀어나왔다. 상관없었다. 왼손으로 나물 하나하나를 입속에 구겨 넣으며 먹어치웠다. 맛났다. 정말 맛있는 맛이라고 할 순 없지만 처음 격은 맛에 놀라 어머니와 같이 먹는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먹었다.


 "꺼억!"


 산적 같은 트림을 내며 나는 몸을 뒤로 젖혔다. 어머니는 말없이 비어버린 대야를 치우고 다시 미싱 일을 하셨다. 그 날 저녁은 다들 굶었다. 점심에 미친 듯이 먹었던 밥은 그 날의 마지막 분량이었다. 어머니는 분명 이를 아셨을 텐데 왜 그러셨을까?


 시간이 지나고 어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추억이 된 그날의 맛이 그리워 비빔밥을 만들기로 했다. 이왕 먹을 거 정말 맛있는 먹고 싶었다. 인터넷에 황금 레시피를 검색했다. 재료는 애호박, 당근, 양파, 양배추, 고기산적, 표고버섯, 달걀프라이였다. 나는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만들었다. 비빔밥 광고에서 나오는 것처럼 이쁘게 스타일링까지 했다. 재료들이 상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비볐다. 그리고 한입 크게 먹었다. 어른이 되어서 그런지 입에 삐져나오는 반찬들은 없었다. 맛있다. 정말 이건 팔아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최고였다.


 하지만 아쉬웠다. 정말 환상적이고 입에서 살살 녹았지만 그때 그 맛은 아니었다. 뭐가 부족한 건지 뭐가 과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머니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다 먹고 설거지를 했다. 그릇은 깨끗이 닦였지만 아쉬움은 닦이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수십 번을 넘게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항상 감탄하는 맛이었지만 언제나 그때 그 맛은 아니었다.


 취직을 하고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제때 끼니를 때울 시간이 없었다. 식사 때마다 입에 빵이나 김밥을 물고 달리는 게 익숙해졌다. 그러다 바빠서 하루 종일 굶은 날이 있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서야 퇴근하고 피곤에 절어 저린 몸으로 내일을 위해 자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배고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성을 잃고 일어났다. 부엌에 가서 큰 냄비 하나를 꺼냈다. 가족들이 남긴 찬밥을 넣고 냉장고에 있던 아무 반찬들을 집어넣었다. 고기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며 고추장과 참기름을 부어버렸다. 양손에 숟가락을 하나씩 들고 본능적으로 비볐다. 어느 정도 비벼지자 숟가락에 가늠할 수 없는 양을 퍼서 먹었다.


 아, 이 맛은. 웃음이 났다. 너무 기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찾아냈다. 그때 그 맛을. 계속 먹고 싶었지만 웃음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그렇게 만들었었는데. 그렇게 찾아 헤맸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찾을 수 없었던 그때 그 맛이 왜 이제야 날까.


 지금도 나는 그때 그 맛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비빔밥을 만들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살아간다. 하루하루 후회 없이. 그리고 믿는다.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내가 찾지 않아도 그때 그 맛이 나를 찾게 될 거라고. 엄마의 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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