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초심(首邱初心)

by 안신영


지금 살고 있는 온천천 변은 한창 공사 중이다.


IMF 속에서 실직자들은 늘어났고 실업자들을 구제하는 방편으로 각 자치단체들은 공공근로라는 사업을 벌였다. 옛날의 온천천에서 뛰어놀던 물고기를 오게 하려고 대대적인 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의 휴식공간을 함께 마련한다며 갈대숲이 한창인 가을을 싹둑 베어 날려버리고, 환삼덩굴이며 여뀌의 자생지를 한나절에 초토화시켰다.


몸 안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서운한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푸르름, 서걱대는 바람소리, 풀밭을 바라보며 위안을 삼았던 일들이 고향의 낮은 산을 끼고 돌아가는 강물을 더욱더 생각나게 한다.
온천천 변은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바람결에 일렁이는 명아주며 메꽃과 망초, 달개비 등 들꽃들의 부드러운 속삭임이 편안했다. 가끔씩 유년의 고향을 그리며 풀꽃들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다. 비록 맑고 깨끗한 물은 아니지만 물이 흐르기 때문에 더욱 좋다.
우리 모두는 결국 우리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죽으리. 페인트 냄새와 빌딩 숲이 하늘을 가리는 곳이 아닌, 고향의 개나리가 노랗게 봄 인사를 하고, 아지랑이가 얼굴을 간질이며 휘감는 곳에 묻히리라.

지나는 길마다 가득 채운 여린 풀들이 실바람에 하늘대고, 모심을 논에는 까맣게 떠 있던 개구리 알이 어느새 꼬리를 흔들어 대며 놀고 있어 아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 길옆에 늘어선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꽃을 피울 때면 한 움큼 씩 따다 입안에 넣곤 했다. 아카시아, 달콤한 향내가 입안에 가득할 때면 어디서 날아왔는지 앵돌아진 벌들이 한방씩 쏘아대면 아이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 달아나고....
그렇듯 고향 길은 평화롭고 아름답게 펼쳐지는 우리들의 꿈길이었다. 새 봄이 가장 좋다. 온 산을 진달래가 분홍으로 물들이고 동그란 무덤 옆에 고개 숙인 할미꽃도 많았다. 그 고향엔 어른들의 정겨운 말씀도 메아리 되어 남아 있다.
“산속에 들어가지 말고 곧장 오너라. 문둥이 나타날라.”
봄이면 빠지지 않고 문둥이 얘기가 나왔다. 그때는 산짐승들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문둥이 기도 했다. 어른들의 염려로 주의를 주시는 말씀이지만, 무서워하면서도 호기심에 문둥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정말 나타날까? 가슴을 졸이며 미적미적 꽃을 따며 두리번거렸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 할미꽃의 숙인 고개를 바로 펴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다 고요한 산속에서 부스럭대는 소리라도 나면 모두가 놀라서 신발을 들고 단숨에 산을 내려오기도 했다.

가을엔 솔방울을 따느라고 마을의 앞산 뒷산을 여럿이서 가마니를 끌고 다녔다. 겨울에 조개탄으로 난로를 피울 때 불쏘시개가 솔방울이었다. 빨갛게 타오르는 조개탄의 추억과 솔방울의 매캐한 냄새가 아련하게 코끝에 감돈다.
드디어 흰 눈이 푹푹 쌓이는 겨울에는 새끼줄로 신발을 가운데에 묶고 미끄러지지 않게 하고 학교를 간다. 학교 가는 길에 어느 나무 밑에 인가에 고구마를 숨겨 놓는다. 돌아오는 길에 먹는 우리들의 간식은 눈 속에 묻혀 있던 차디찬 날고구마였다. 그때 먹었던 아삭아삭한 고구마의 맛은 지금도 생생하나 그 맛을 지금의 고구마에서 얻을 수는 없었다. 가끔 아이들에게 그때 일을 들려주며 고구마를 깎아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믿으려 하지 않는다. 숨겼던 고구마를 찾지 못하다가 며칠 후에 우연히 찾는다.
토끼 아니면 다람쥐 같은 산 짐승들이 갉아먹은 흔적을 발견하기도 해서 토끼나 다람쥐를 찾는 다며 한참 눈 속을 헤매기도 했다. 사철 산속을 뛰어놀며 자랐던 우리의 어린 시절은 요즘 아이들이 꿈꾸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학교 과제물과 과외수업, 예능 공부 등 쉴 사이가 없다. 특히 컴퓨터 게임은 아이들을 하늘 한 번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빼앗아갔다. 휴식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한다지만 자연은 이미 훼손되어 옛 모습을 잃어간다.

고향에 묻혀 여름날의 한줄기 쏟아붓던 소나기가 그친 뒤, 소나무 밑에서 볼쏙볼쏙 솟아오르는 노란 버섯이 되고 싶다. 몽실몽실 피어나 숙일 대로 고개 숙인 수줍은 할미꽃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정겨운 얘기를 나누고 싶다.
금강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이라 해서 마을 이름조차 합강인 곳. 하루 종일 햇볕이 잘 들어 양짓말(양지마을)인 뒷산에 묻혀 봄이면 진달래로 물들고, 여름이면 우짖는 산새와 벗을 하며 지내고 싶다. 하얀 눈 속에 한 덩이 고구마로 있다가 배고픈 산 짐승의 먹이가 되어도 더 바랄 것이 없겠다.(1994)


*photo by young.(2년 전에 세종시로 변한 고향에 가니 문성공 안향 사당은 서원으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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