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의 여행

by 안신영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탐스럽게 푸른 숲으로 서 있더니, 어느새 대롱대롱 씨앗 방울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마을 어귀에 수령을 알 수 없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오고 가는 이 말없이 동무해 주는 길을 걷다가,
“얘들아, 저기 까치 아파트가 있네!”
알몸으로 드러난 이 가지 저 가지 위에 둥근 까치집 세 개가 얹혀 있다.
“하하, 호호, 히히히.”
아이들의 저마다 특색 있는 웃음소리가 겨울 하늘에 투명한 바람 되어 퍼져 나간다.


그 해 청평사 앞 고즈넉이 서있는 미루나무 위에 외롭게 떠 있던 까치집이 그림 되어 내 눈 안으로 들어왔다.
간단한 소지품을 챙겼다.

늘 어깨에 메고 다니던 우체부 가방처럼 큰 가방은 여행의 기쁨에 들떠 큰 입을 더욱 크게 벌리고 나를 반겼다. 친구들 몇 이서 짜 놓은 여행의 일정은 호반의 도시 춘천을 다녀오자는 것이었다. 약속된 날이 다가올수록 하나둘씩 갈 수 없다는 연락을 해 왔다. 들떠서 계획을 짤 때는 언제고...

그렇다고 스케줄을 바꿀 수는 없었다. 뼛속까지 파고든 허무의 그림자를 물리칠 방법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나는 혼자라도 떠나기로 했다. 두 번째 몸담은 직장마저 나의 욕구를 해소시켜 주지는 못했다. 적성에 맞을 것이라고 기꺼워했지만, 졸업 전의 꿈과는 무관하게 다가오는 기성세대와의 갈등에서 나날이 쌓여 가는 회의를 어쩌지는 못했다.

혼자 여행을 간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고, 스릴 넘치는 묘미로 벌써부터 전신을 감싸고도는 가벼운 흥분마저 느꼈다. 혼자만의 은밀한 기쁨을 누리며 큰 가방을 둘러맸다.

토요일 오후 붐비는듯한 시외버스에서 내려 낯선 도시에 첫발을 디뎠다. 막국수 간판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 춘천에 닿았다는 실감이 여리게 다가왔다. 지나오며 보아둔 의암호반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호수 쪽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유명한 찻집 `에티오피아'에 앉아 호젓하게 호수의 물빛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을 마셨다.

`아!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구나.'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깊은 감탄사와 함께 행복감이 저녁 햇살과 쏟아져 눈부시다. 머릿속에는 `청평사를 보고 가야지' 하는 욕심이 가득 차와 얼른 시내 쪽으로 나왔다.
물어 물어 소양댐 어귀까지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사전 지식도 없고, 지도 한 장 없이 무모한 여행은 아닌가 하며 버스 기사에게
“청평사 가려면 어디쯤 내려요?”
운전기사의 대답도 나오기 전에 서너 명의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들이 먼저
“청평사 가세요?”
“네.”
“그럼 종점에서 내려 소양댐 나루까지 가서 배 타고 들어가야 해요.”
친절하게 일러주는 그들이 고마웠다. `배 타고 들어가는 줄은 몰랐네. 아무튼 가는데 까지 가보고서....'

종점에서 그들도 내리고 나도 내렸다. `다음에 또 봅시다.' 헤어져 어스름 저녁 길을 걸어갔다. 노루꼬리처럼 짧은 겨울 해를 뒤로하며 무서움 같은 것이 느껴졌으나 의연한 모습으로 또박또박 걸어 나갔다. 누가 보지도 않는데 혼자서 어깨를 곧추 세우고 씩씩한 척. 걸어도 걸어도 소양 댐은 쉬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시처럼 금세 목적지가 나타나지 않는 곳이 시골길 인가 보다. 후회할 수도 없는 나의 긴장된 모험심은 고개를 일부러 힘을 주어 세우고는 똑바로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이제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왼쪽으로는 산을 끼고 오른쪽은 어둠뿐인 신작로를 걷는데 구두 소리가 꼭 누군가가 뒤따라오는 느낌이다. 간혹 오가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온다. 나루터까지 등에 식은땀을 흘려가며 올라갔으나 밤에는 배가 뜨지 않는 단다. 숙소도 없단다.
어둠 속을 헤치며 종점까지 다시 돌아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어? 웬일이세요. 청평사 못 들어가셨어요?”
버스 안에서 만났던 청년들이다. 순간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은 여행지에서의 잠깐 만났던 인연 때문일까? 밤을 보낼 주전부리 감을 사러 가게에 들렸다가 나를 보았단다.
“ 못 갔어요. 내일 가야겠어요.”
“ 잠잘 데는 있어요?”
“ 시내로 나가려고 해요.”
“ 괜찮으시다면 저희 누님하고 주무시고 같이 청평사에 가죠.”
일순간 그들을 훑어보며 괜찮은 사람들일까 생각했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자, 일행들이 이구동성으로 권한다.
전화국 관사라며 들어선 집에는 내 또래의 아가씨가 스스럼없이 날 맞아 주었고, 혼자서 의 여행을 흥미로워했다. 동생과 친구들이라는 학생들도 ` 누님, 누님' 호칭하며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그들도 주말에 친구들과 바람 쐬러 그곳까지 온 것이었다. 밤을 잊은 듯이 음악이며, 문학이며를 얘기하다가 아침을 맞았다.

뿌연 해돋이에 전혀 새로운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야 가득 가린 안개의 골짜기를 지나 겨울나무숲이었고, 옷 벗은 나뭇가지들은 하늘 위로 팔을 벌리듯 서서 나를 일시에 바라보고 있음에, 놀라워 잠시 숨이 멎는 듯했다. 어젯밤 가슴 졸이며 걸었던 길이 밝은 이 아침에는 무서움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리 만치 깨끗하게 빛나고 있었다.

소양 댐으로 올라가는 옆길엔 봄이 멀었음에도 노란 개나리가 성급하게 피어 수줍게 떨고 있었다. 청평사로 들어가는 뱃길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 겨울 나목들. 그들도 열병을 앓고 난 사람들처럼이나 썰렁하니 보였다. 내 마음이 옮겨가 그들을 아프게 한 것 같다. 저 멀리, 아롱지는 눈물 사이로 겹쳐 떠오른 빈 들에 미루나무 한 그.


미루나무 꼭대기에 구름처럼 머물고 있는 까치집이 들어왔다.

홀로 있는 까치집이 꼭 나 자신처럼 느껴져 저린 가슴이 되었다. 혼자 떨어져 보면 더 나은 내일이 다가올 줄 알았던가. 자만심과 오기만이 나를 지탱해주던 시간들, 사람들 속에 섞여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이상과 현실 속의 괴리에 참담하기조차 했던 젊음이었다.


청평사는 퇴색할 대로 퇴색하여 초라한 모습이지만, 잘나지도 특출 나지도 못한, 오만에 쌓여 허우대던 나를 말없이 맞아 주었다.
황량한 겨울의 주변에 고만고만하게 새 봄을 기다리는 겨울 나목들 보다도 더 작은 자신, 불어오는 한줄기 강바람에 문득 깨달음이 여민 옷깃 사이로 살며시 파고든다. 이제 더 이상의 허무와 서러워할 것도 없음을 알았다. 자유분방함이 자칫 주체할 수 없는 방종으로 흐를까 봐 서둘러 서울로 돌아와 버렸다. 마음속에 그려 넣은 빈 까치집에도 더 이상 외롭지 말라는 바람을 주면서.


겨울이 되면 유난히 까치집이 눈에 띈다. 무성했던 나뭇잎 숲에 가려 보이지 않더니, 평화롭던 안식처도 계절과 함께 변화함을 맞는다. 왠지 썰렁하다. 그래도 떨어진 낙엽들은 포근한 밑거름 되어 봄이 오면 연초록의 새 잎이 돋아나겠지. 진초록 향기가 짙어지면 까치 식구들이 더 불어나 집 하나가 더 늘지 않을까?


손을 잡고 걷는 아이들이 자라나 제 각기 떠나게 되면 빛나던 윤기의 육체도 사라지고 헐벗은 저 플라타너스처럼 되어 무엇을 생각할까?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새들에게 후한 인심으로 집을 짓게 하고, 비바람 피할 수 있는 무성한 숲도 넉넉하게 만들어주는 후덕한 플라타너스를 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저 아름드리나무를 닮아 정신을 살찌우고, 내 아이들이 어느 곳 어떤 자리에서도 꿋꿋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부모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젊은 날 겨울여행에서 돌아와 자신 있게 살아왔던 나날들을 겨울 나목 아래에서 다시 한번 돌아본다. (1996)


*photo by young.













매거진의 이전글 그건 가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