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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Apr 10. 2021

소설 같은 이야기 8

다시 부산을 가다

소진이는 여섯 살입니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지요. 소진이는 어린이집에 다니던 2001년 여름부터 제가 돌봐주고 있는 아이입니다. 아니 제가 반은 키우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지요.

소진이 엄마가 직장에 다녔었고 그 후엔 개인 사무실을 오픈했고요. 그래서 계속 바쁜 엄마이지요.

소진이는 형제가 없어요. 그래서 늘 외로워한답니다.

저녁에 엄마 아빠 둘 다 늦는 날이면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기도 하지요.

이른 저녁을 먹고 블록 놀이나 어린이 프로를 보고 있거나 할 때 전화가 옵니다. 엄마던 아빠던 소진이의 첫마디는 항상 똑같습니다.
"누가 먼저와?"
그럴 때면 아이의 가슴속에 기다림의 열망이 얼마나 간절하면 첫마디부터 저런 말이 나올까 가슴이 짠해옵니다.

 소진이는 아침에 어린이 프로를 보면서 아침을 먹습니다.
소진이는 밥을 입안에 넣고 TV를 보느라 음식을 씹는 것을 잊습니다. 옆에 앉아서
"소진아 꼭꼭 씹어야지." 하면 한 두 번 우물우물 결국엔 티브이에 마음을 빼앗겨 밥 한 숟가락이 5분, 10분이 되어도 소진이 입속에 그대로 있습니다.
아빠가 지나가다가

"소진아 꼭꼭"

엄마가 지나가다가  "소진아 씹어야지." 그러다가 안되면

"티브이 끈다."

"안돼." 고개를 잘래 잘래 흔드는 소진이. 밥 제대로 안 씹어 먹으면 소진이 좋아하는 것 안 해준다고 반 협박을 해가면서 전쟁을 치르듯이 아침밥을 먹입니다.


 저녁엔 소진이와 둘 뿐입니다. 저녁밥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뚝딱 먹는 소진입니다. 아침의 두배가 되는 밥을 잘도 먹습니다. 저녁에도 가끔 티브이에 정신을 빼앗기면 저는 사정없이 리모컨 버튼을 눌러 티브이를 꺼버립니다.
소진이 밥을 먹일 때면 막내딸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놓고 음악에 맞춰 음식을 씹으라고 하면 그대로 음률에 끄덕끄덕 거리며 밥을 먹던 딸. 먹기 싫어하면 나이 숫자대로 밥 숟가락을 세어 먹으라고 했던 일. 나이 숫자만큼만 먹어도 충분한 양이 되었으니까요. 보통 5~6살 때는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그러나 티브이를 보며 밥을 먹거나 음식을 입에 물고 돌아다니는 일은 절대 금물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아서인지 밥상 앞에 앉으면 식사가 끝나야 일어날 수 있었지요.


 요즘 아이들은 형제 없는 아이들도 많고 영상 매체가 많아서 밥 먹는 시간조차 영어 공부와 티브이 유치원을 보며 학습 능력을 키워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진이는 예쁘고 똑똑합니다.
매우 사랑스럽고 감수성도 풍부해서 금방 슬프기도 하고, 금방 눈물을 주르륵 흘리기도 하지요. 엄마 아빠 늦으면 자려다가도 금세.
"엄마 보고 싶어." 하며 울기도 합니다. 또 아빠가 늦는다며 전화기를 들고 핸드폰 번호를 꼭꼭 눌러 전화를 해서 왜 늦느냐고, 집 앞이냐고 묻습니다. 집 앞이라는 대답을 들으면
'앗~싸!" 하며 팔을 들고 공중으로 뛰어오르죠.
유치원 보내고 데려오고 밥을 먹이며 시간을 많이 보내는 이모와 같이 있지만 부모만 하겠어요? 늘 엄마 아빠가 그리운 소진입니다. 역시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최고죠.


 소진이는 매우 바쁩니다.
월요일, 수요일엔 발레를 배우러 갑니다. 목요일엔 잉글리시 뮤지컬을 배우러 다녀오고, 금요일엔 한글 깨치기를 합니다. 소진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가면 오늘은 어디가? 하며 묻습니다. 화요일엔 아무 데도 안 간다. 그러면 또 표정이 환해지며 유치원 마당에 있는 자동차도 타고 미끄럼도 타고 놀다가 집으로 옵니다. 늘 밖에서 놀고 싶어 하는 소진이 입니다. 형제가 없어 외로운 소진이를 위해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기로 했습니다.
수요일마다 같이 발레를 배우는 친구들 4명을 집으로 데려와 2시간 정도 같이 놀게 하는 거지요. 그래서 수요일은 저도 덩달아 바쁩니다. 맛있는 간식을 준비해야지. 꼬마 손님들 발레 한다고 뛰어다녔으니 출출할 거야. 그래서 핫케익도 굽고, 과자와 음료수도 준비합니다. 역시 아이들은 함께 어울려 놀아야 합니다.
저희들끼리 무엇이 그토록 재밌는지 헤어질 땐 아쉬워서 더 놀고 싶다고 떼를 쓰는 소진이에게 다음 주를 약속하고 친구들을 보냅니다. 돌아가는 친구에게 장난감도 들려 보내고 바나나, 밀감 등을 꺼내다 손에 손에 쥐어 보내며 주는 기쁨까지도 누릴 줄 아는 소진이는 금세 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 친구들이 오는 날이라고 어제부터 들떠 있는 소진이는 한창 예쁘게 자라고 있는 여섯 살 소녀입니다.




 소진이를 돌보면서 써 놓았던 글이다. 남의 집 아이 같지 않고 마치 피붙이 같이 생각하던 아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소진이 부모도 내게 아주 잘했다. 소진이가 일곱 살이 되자 소진이 엄마의 꿈대로 분당 구미동에 한국의 비버리힐스라 불리는 곳으로 이사를 한다. 대형 평수(90~99평)의 빌라단지로 이루어진 조용한 마을이었다.  주택이 고급지고 깨끗해서 가끔 영화 촬영팀을 만나기도 해서 출연 배우와 짧은 얘기도 나눈 적 있다. 그곳으로 이사 가면서 둘째와 함께 지내도록 방을 마련해 침대, TV까지 놓아주었고 아르바이트하던 둘째를 정직원으로 채용도 해주었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직원을 더 채용해야 하는데 함께 사무실에서 일했던 직원들이 100% 둘째에게 표를 던져서 정직원이 되었다. 워낙 성실하게 일하는 아이여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또 둘째는 강남의 고속터미널에 있는 카페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회사에 정식으로 입사하게 되어 그만두려니 실장이 붙잡아서 주말에는 카페에 가서도 일을 했다. 어느 때는 주말이 아니어도 일을 해달라고 간청을 해서 회사 마치고 가서 일하고 막차를 타고 분당으로 와야 하는 일도 있었지만 즐거워했다. 주말에는 둘이서 목욕도 가고 맛집에 가서 밥도 먹는 행복을 누렸다.


 소진이는 일곱 살이 되자 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키즈 잉글리시 학원에도 다녀야 하고 스케이트장에 가서 스케이트도 배워야 했다. 또 수영장에 가서 수영도 했다.

"소진이가 강사며 사람들이 낯설어 무서워하니 티켓을 끊어 드릴 테니 옆 레인에서 이모님도 함께 수영을 하시면 어떻겠어요?" 하는 소진 아빠 말대로 소진이 수업받는 날 옆 레인에서 지켜보며 자유수영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남의 아이를 돌봐주는 생활을 해야 하는지 걱정도 되었다. 아이가 크면 내 손이 필요하지도 않을뿐더러 미래가 불투명한 채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무료로 방을 이용하고 있으니 내게는 집안일이  더 많아졌다. 반려견을 키우고 싶다며 비글을 한 마리 입양을 했는데 그 녀석은 산만해서 다루기가 힘든 3대 악마견에 속한다는 견종이라서 전문기관에서 훈련을 받아야 키울 수 있다. 그런데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소진 아빠가 하고 싶은 일중의 하나를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 녀석까지 케어하는 일은 내게 힘이 부치는 일이다. 호야처럼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소형견은 함께 오래 살기도 했고 내 가족이기에 가능하지만 남의 집 반려견까지 케어해야 하는 일은 내게 스트레스가 되었다.

 집안일은 그래도 괜찮은데 부부 침실 옆에 있는 욕실을 청소해야 하는 일은 그들의 프라이버시에 속한다며 안 했는데 소진 엄마는 그것이 불만이었나 보다. 어느 날 퉁퉁 부은 얼굴로 볼멘소리를 하는 것이다.

"친구들이 ㅇㅇ씨까지 함께 지낸다고 하는 내게 미쳤냐고 해요. 소진 아빠가 있는데 아가씨까지 집에 들여서 사느냐고 하더라고요. 호야 산책시키실 때 저 빙고도 해주시면 좋은데, 우리 방 욕실이 더럽더라고요."

마침내 올 것이 온 것이다. 이사를 하고서 빌트인 가구와 여러 가지 일들을 집주인 대신에 다 해결하며 식사가 불편하지 않도록 밑반찬도 다 만들어 주고 입주 가정부 노릇 비슷하게 해왔는데 성에 차지 않은 것이다.

 


 

 막내가 그리스로 떠나기 전에 큰 딸 얘기를 해주었다. 배가 남산만 해져  남편과 함께 갈 곳이 없다며 제 아빠를 찾아와 함께 살았는데,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나가게 되어 언니와 몇 개월 살면서 도와주다가 자신이 그리스를 가게 된 것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더욱이 엄마도 없는 데 아기를 낳았다고 하니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딸이 죽을죄를 지었다고 해도 이것은 아니었다. 임부복 하나 사주지 못했는데, 입덧할 때 맛있는 것 한 가지도 해주지 못했는데, 못해준 것만 생각나며 마음이 아팠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존심도 접고 그 인간을 찾아갔을까? 그 상황에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기도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부산 땅은 밟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을 했어도 딸이 그렇게 형편없이 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니 마음이 흔들렸다.

 소진이도 여덟 살이 되면 초등학교 입학을 하게 되어 도우미는 필요 없다고 하고, 그때쯤 부산의 친구는 자주 연락을 해서 언제까지 남의 집살이를 할 거냐. 부산에 내려와라. 시누이가 다니는 회사에 취직을 하라고 성화였다. 언제쯤 시누이가 서울에 출장을 가니 한번 만나보라고 한다.


그 시누이가 서울역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을 때 일단 만나 보았다. 아무나 입사시킬 수는 없고 일단 면접을 보고 상태가 어떤 사람인지 간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난 PCA라는 곳이 무슨 일을 하는 회사 인지도 몰랐으며 외국회사라는 것만 듣고 괜찮은 곳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부산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둘째도 제 언니 소식을 듣더니 저와 다투고 나가 소식 끊어서 야속했지만  동생에게서 얘기를 전해 들은 뒤에 혼자 내려가 조카를 보고 와서는 조카가 눈에 밟혀서 부산에 내려가자는 말을 계속 했다.

가족이 모여 살아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부산 가기를 원했다.

"엄마, 혼자 내려갈게. 너는 오피스텔이라도 하나 얻어서 회사 다녀. 좋은 직장을 버리고 간다는 게 아쉽잖아." 말을 하지만 같이 내려가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소진 엄마의 속내를 알고부터는 엄마가 마치 가정부가 된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던 모양이다. 이런 각박한 세상에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살게 해 준 것만으로도 난 고마웠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소진 엄마가 원하는 일들을 말끔히 해주고 빙고를 딸과 함께 산책도 시켜줬다. 중형견이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라서 혼자 호야 산책시킬 때에 같이 나간다는 것은 위험했다.

호야는 목줄을 하지 않아도 보도로만 다녔고 함께 나가는 사람과 보조를 맞추며 제 볼 일을 보는 아이라서 아무런 걱정이 없는 아이다. 그런데 빙고는 무리다.

 

 그리고 어느 일요일 교회에 갔더니 구역 권사님이 불러 조용히 물어보신다.

"박 집사랑 연락해요? 혹시 계 들었어요?" 그 언니에 대해 궁금한 듯 말씀하시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요즘 언니가 교회도 안 나오고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과 지낼 방을 구하기 위해 모으는 돈인데 잘못되면 큰일이다. 매달 꼬박꼬박 곗돈을 계좌에 이체시키고 있으니 내게는 가끔 안부 문자가 왔고 반포에서 상도동으로 이사 간 것 까지 말을 해서 알고는 있었다. 모른 척하고 연락해서 상도동 어디로 이사 갔느냐? 언니 보고 싶은데 한번 만나고 싶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더니 아파트와 호수를 말해준다. 시간을 내어 언니 남편이 있을 저녁 시간에 일부러 찾아갔다. 남편이 있는데서 언니를 만나야 상황을 알기 쉬울 것 같았는데 당황하는 것이 역력했지만 애써 웃어 보이며

"찾아오지 않아도 되는데 왔네?"

"급해서 왔어요. 부산으로 이사 가야 하는데 곗돈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요."

이번 달에 곗돈을 타고 싶다. 부산에 오피스텔이라도 구해야 해서 곗돈을 태워주기를 원한다고 말하니 남편 눈치를 보며 다음날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나를 보낸다.

언니의 말에 다르면 곗돈을 탄 사람이 다음부터 돈을 안내서 대체해서 넣고 있는데

" 네 돈은 해줄게. 미안하다, " 처음에 말한 액수의 목돈은 아니지만 우선 일부를 보내줬고 시간은 걸렸지만 몇 개월에 걸쳐 띄엄띄엄 내가 낸 곗돈은 전부 보내줬다.

 사실 부산에 오랫동안 살아서인지 서울이 영 불편했다. 부산은 어딜 가도 아는 얼굴들이고 병원 의사들도 전부 아는 사람들 이라서 편했는데 서울 생활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 부산으로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서울 온 지 5년 차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우리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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