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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Apr 11. 2021

소설 같은 이야기 9

보험회사 취직

부산에 내려가기로 결정을 했다고 하니 막내딸이 힘들게 번 돈을 보내줬다. 앞으로 한국에 나오게 되면 엄마와 함께 지내야 한다면서 부담 같지 말라면서 피 같은 돈을 보내준다.

부산에 내려간다고 하니 소진 엄마는 굳이 내려가야겠냐면서

"지금처럼 해주시면 계셔도 상관없어요." 한다.

하지만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며 미안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마침 큰딸의 아기가 돌이라서 일정에 맞춰 내려가 친구 시누이를 만나서 지점장 면접을 보았다. 회사는 보험 회사였고 영국계 회사인 PCA이다. 보험사에 들어가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을 성공적으로 하면 어떤 보상이 따르는지 동영상으로 한참 보여 준다. 일을 해서 꼭 저렇게 되어야지 하는 마음이 들도록 화려하다.

그런데 정말 낯선 일이었고 신혼 때에 남편 친척이 와서 애들 보험을 가입하라고 권해서 가입한 적은 있지만 어떤 일일지 대략 짐작은 가는데 썩 마음에 내키는 일도 아니긴 했다. 주변에 보험사에 다니다가 힘들어진 사람들을 봐 왔기 때문에 잘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지점장은 외국계 회사인 만큼 도전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젊은 피를 가진 직원이 필요해서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하며 본부장이 OK사인을 내리면 근무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당시 마음은 합격만 시켜 준다면 제대로 교육받아서 열심히 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에 OK사인이 떨어지길 간절히 바랬다. 사무실과 가까운 오피스텔을 알아보고 계약을 마쳤다.

 

 이사를 하는 날 앞집의 영우 엄마가 가장 섭섭해했다. 이젠 사람에게 마음 주고 살지 않겠다며 울었다. 그녀는 우울증을 앓고 있어서 힘들어할 때 삼 남매와 우리 호야랑 죽이 잘 맞아서 참 좋아했다. 남에게 웬만해서 마음을 주지 않는 호야도 그녀와 아이들을 잘 따르고 좋아했다. 아이들과 동물은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을 금방 알아본다더니 그들의 진심에 호야는 금방 마음을 열었다. 그녀가 저를 불러주기를 오매불망 기다릴 때가 많다. 산책이라도 나가려 나서면 우릴 보고

 "이모님 차 한잔 해요"하는 소리에 재빠르게 꼬리 치며 발코니를 통해 그녀에게 달려가던 호야. 거기서 일 년 동안 살면서 그녀에게 받은 사랑은 평생 잊지 못할 일이다.


"수요일 오후부터 몸이 이상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 동안 정신이 멍하더니 목소리가 잠겼다.

그리고는 콧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다음날 손쉽게 약국에서 콧물감기약을 사 먹었다.

하루를 보내면서 차도는 없었다. 저녁에 퇴근한 딸아이까지 증세가 똑같았다.

 아침에 출근하는 딸이

"낮에 병원 다녀오세요. 저도 시간 내서 다녀올 테니까요..." 부탁을 하고 나갔다.

2주 전엔 기침감기로 병원을 다녀와 일주일을 앓고 났는데, 다시 병원에 가니 정말 의사 얼굴 보기가 민망스럽다. 얼마나 몸 관리를 안 했으면 한 달도 안 돼 병원에 왔을까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앞집 그녀가 마침 영우가 수두에 걸려 같이 가자는 바람에 또 그녀의 차 신세를 졌다.

지난번에도 영우 독감 예방주사 맞으러 가는 길에 차에 태워 같이 가서, 치료를 하고 돌아왔는데....

금요일.  어떻게 하루가 지났는지 모르겠다.

어영부영 감기 기운에, 약 기운에, 나의 실체는 어디론가 바람 빠져 버리듯 빠져버려 허우적거렸다.

토요일. 하루 종일 잤다.  마침 딸아이도 휴무라서  증세가 같으니, 감기약을 나눠 먹고(너무 바빠서 병원에 못 같다나)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저녁때 현관 벨소리에 딸아이가 나가 문을 여는 것 같더니

"엄마~ 엄마! 나와 보세요~"

몸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해 어기적 어기적 걸어 나가니

"어구 구. 약에 어리시는가 보다.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영우 맘이 쟁반을 들고 식탁으로 가져가 내려놓는다.

"밥은 있으시죠? 어서 많이 드시고 감기 나으세요."

딸아이와 나는 할 말을 잊고 그저 그녀만 바라 보고 서 있었다.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그러고는 총총 사라진다. 식탁에 있는 쟁반을 내려다보니 된장찌개, 생선구이, 생채나물 등이 맛난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엄마! 너무 고맙다. 그렇지? 안 그래도 뭔가를 해서 엄마랑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 나도 뭔가를 해야 하는데 자꾸 까라져서 못 일어나고 있었어."

딸아이와 나는 감동에 목이 메어서 서로 말도 못 하고 밥만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생채 나물이 맛있다며 우렁된장찌개를 떠먹고, 생선도 가시를 발라 내 밥 위에 얹어 준다.

어떻게 신세를 갚지? 둘은 골똘히 머리를 맞대 보지만 그냥 이렇게 받고 다음에 기회가 오면 갚자......

"맛있게 잘 먹었어요.

그대의 정성으로 힘이 불끈 솟아나는 것 같아요.

감사한 마음 이 그릇 안에 가득 담았으니 받으세요."

유리그릇 안에 메모 한 장 넣는 것으로, 가슴에 깊이 새기는 것으로 그냥 시간이 지나갔다.

 이튿날은 십전대보탕을 끓여 유리병에 담아 오기도 했다."


마음 씀이 너무나도 예쁜 사람이다. 그곳에 살면서 그녀와의 일화는 수없이 많다. 여동생이 없는 나는 여동생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을 마냥 퍼주고 살았다. 그녀도 우리에게 참 잘했다. 헤어지려니 가슴 아팠다. 만났다 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을 회자정리(會者定離)를 떠 올리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는 길밖에 없다.

 


  둘째는 새 직원에게 인수인계 문제로 나중에 내려오기로 하고 우선 혼자 먼저 내려가 살림을 꾸렸다.

 면접을 본 PCA는 본부장이 불합격 처리하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튿날 새벽 첫 차를 타고 서울역 앞에 있는 본사에 갔다. 본부장을 만나서 일도 시켜보지 않고 왜 탈락시켰냐고 따지려고 했지만 부산에서 대구지사로 갔기 때문에 본부장을 만나 볼 수 없어 전화를 했다. 나이가 있어서 안된다는 것이다.

세상은 만만한 것이 아닌데 내세울 것 한 푼어치도 없는 데다 면접 당시에 여러 가지 필기로 설문지에 답했던 것에도 나는 잠재 고객이 일도 없는 지원자였던 것이다. 5년 만에 부산에 왔으니 맨땅에 헤딩하며 고객을 발굴해내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 있었고,  경력이 있길 하나 고객 가능성 설문에 있는 대로 느낀 대로 기술을 했으니 그래프는 형편이 없었다. 지점장이 보여주는 결과물을 보며 절망했다.

순간 아득했다. 이 회사만 믿고 부산에 내려왔는데 퇴짜를 맞았으니 갈 곳이 없게 된 것이다. 세상을 몰라도 이리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나이를 헛 먹은 거지. 자책의 마음으로 있는데 그곳 매니저가 다른 보험사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몇 마디 나누더니 당장 면접을 보러 가라고 한다.


 그곳은 미국계 보험사였다.

거기도 지점장 면접을 보고 먼저 들었던 이야기와 똑같은 회사일 얘기를 했다. 일 잘하면 외국 여행시켜주는 것은 물론이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 보험사는 마찬가지여서 합격하면 일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나이가 많은데 합격이 된네요?" 긴장이 풀린 웃음을 띠며 얘기하자 이곳은 50세까지 뽑는다고 하는데 난 생일이 늦어 만 50세라서 된 것이었다. 또 새벽에 본부장을 만나러 서울 갔던 얘기를 듣고 적극적으로 일을 잘할 것 같아서 지점장에게 적극 밀어붙였다고 한다. 파트너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부산에 왔으니 만나봐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우선 대학의 해부학 교실 지도교수를 만났다. 찾아간 나를 퍽 의아한 듯이 대했는데 얘기를 듣다 보니 이해가 갔다. 학교를 그만두면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실험동물실을 새로 만들면서 부실하게 만들고 차액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들으니 친구가 했던 말이 떠 올랐다. 실험동물실 만드는데도 그쪽 손을 빌렸던 모양으로 아주 허술하게 만들어서 괜찮을지 걱정된다는 말을 몇 년 전에 들었다.

 병리학 교실의 여직원을 연락해서  만났는데 표정이 뜨악하다. 예전에 가끔 볼 때는 '사모님, 사모님'하며 상냥한 사람이었는데 영 태도가 석연치 않게 느껴졌는데 역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의문이 풀렸다.

"교수님이 세미나에 다녀와보니 사모님께서 애들하고 통장이니 카드니 다 갖고 떠나셨다고 하면서 여관에서 한동안 힘들게 지내셨어요. 그러다 결혼식을 올린 거고요."

하! 기가 막혔다. 간단하게 그때의 상황을 얘기하고 헤어졌다. 그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날 현모양처에서 애들 데리고 도망간 질 나쁜 여자로 탈바꿈시켜 놓았던 것이다,


충분히 그럴 사람이다.

어떻게든 자신이 유리하도록 상황을 전개해서 원하는 것을 성취한 사람인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마누라가 날 버리고 도망을 가서 나는 이렇게 밖에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최대한 불쌍한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학교 근처 여관에서 생활하며 불쌍해서 측은한 마음을 갖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유도하고 결국엔 새로 결혼을 해도 절대로 욕을 먹지 않을 것으로 철저하게 계획하고 행동했다.

치과를 하는 남편 친구에게 갔다. 깜짝 놀라며 아이들하고 어떻게 지냈냐며 걱정이 대단하다.

"출근 전에 시간이 있어 TV를 틀었다가 깜짝 놀랐어요. 철이 얼굴이 마귀로 변했더라고요. 창피한 것도 모르고 어떻게 TV에 나왔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교회에 갔더니 마침 목사님 이취임식이 있던 날이었어요. 서울에서도 교회는 꾸준히 다녔어요."라고 하니 다행이라며 애들 안부도 물어 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취직이 안되면 다시 찾아오라고 한다.

남편은 결혼한 여자가 외국 여자라서 TV에 출연을 자주 했던 모양이다. 그들을 필요로 한 콘셉트의 프로그램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니 긴장도 되고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해 나갈 것인지도 제대로 인지해서 대비를 해야 하니 마음은 복잡했다. 둘째도 내려와서 합류하고 당분간 쉬면서 실업급여를 받으며 직장을 알아보겠다고 한다. 고용부에 가서  들어야 하는 교육을 받으며 그동안 고생한 몸과 마음을 쉬도록 했다.

 소진 엄마는 대출받아 집을 얻어 줄 테니 갚아 나가면서 회사를 다니라고 설득했지만 황소고집인 둘째는 결국 부산으로 내려왔다. 이후에도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외국에 전시회도 같이 나가자는 전화를 했다. 세 번째 전화에서는 마지막이다 이제 전화 안 하겠다. 잘 생각해서 결정해 달라고 했지만 둘째는 거절했다.


차츰 부산생활에 적응을 해가며 출근하게 되었고 파트너와 상의하면서 고객을 만들어 가기로 했다.

남편은 부산에서 정말 미친 사람으로 되어 있었다. 의과대학 제자들도 미친 x이라고 부른단다. 들려오는 소문은 오히려 그 사람이 불쌍할 정도였다. 지 무덤 지가 판 것이지 뭐.

부산의 명문고를 나와서 동창들도 쟁쟁한데 대부분 외면하고 만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인맥은 대부분 의사, 변호사, 교수라서 일하기는 괜찮았다. 평소에 친분이 있던 동창들부터 찾아다녔다. 그 사람에게는 죽은 인맥이 내겐 살아 있는 인맥이 되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큰 애는 지지리 궁상으로 살고 있었다.

 제 엄마에게 그렇게 했으면 저라도 이를 악물고 잘 살아야 하지 않나? 혼자 아기를 낳았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대하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고 속만 상했다. 큰 딸은 아기가 있는데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수유를 하고 있어서인지 빼빼 말라 있었다.

우선 아기랑 먹을 과일과 반찬거리를 사다 주고 홈쇼핑에 고기류를 주문해서 보내 줬다. 직장을 나가야 하니 내가 해주는 것은 무리였다.

사위라고 하기도 무엇한 애 아빠는 얘기를 들어보니 직업도 변변찮고 게을러서 일도 제대로 안 다닌다고 한다. 사촌 형이 차린 회사에 출근을 제대로 하지 않아 회사에서는 아침마다 전화가 올 정도로 제시간에 출근을 한 적이 없단다. 얼마나 게을러터졌으면 그럴 수 있을까? 제 자식도 태어났는데 제대로 일을 해야 하지 않나?

보통의 사람은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는데 세상엔 쓸모없는 별종들이 간혹 있는 것이다.


다 잊고 일만 하자.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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