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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Apr 11. 2021

소설 같은이야기 10

인간극장은 거짓말

 주변 사람들은 기가 막히고 절통한 사연을 흥미로워하면서 궁금증을 증폭시켜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내가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어서 젊은 외국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결혼까지 한 것은 아닌가 하고 엿보면서 즐기는 모습이 언뜻언뜻 비친다.

그러니까 TV 프로그램에서조차 검증 없이 흥미위주로 방영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사람과 같은 하늘 아래 숨 쉬며 살기 싫어서 오기 싫었던 부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다시 왔다.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고 보험사에 입사해 어설픈 보험설계사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이 터졌다.

나와 아이들 가슴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그 사람은 모 방송국의 인간극장이라는 프로에 일주일 동안 그들의 사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무엇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촬영을 해서 가식덩어리의 실체를 보여주려는 것인지 아연실색의 도를 넘어서고 있다. 아이들은 큰일이 난 듯 TV를 보지 못하게 했다. 아이들이 걱정이 되었지 난 괜찮았다. 안 그래도 5년여를 힘들게 살았는데 진실은 사라진채로 그들의 사는 모습을 방영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여기저기서 흘러들어오는 얘기를 종합해 본 결과 내용은 이랬다.

그 남자가 마흔이 넘은 노총각이었는데 우즈베키스탄의 한 대학 연구기관에서 그 여자를 만나 늦은 나이에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나누게 되어 결혼하게 되어 한국에서 살고 있다. 나이트클럽 댄서였던 여자가 실험실 연구원으로 둔갑하기도 하네? 동물병원을 하고 있는 수의사 아저씨는 마음이 너무 착해서 개와 고양이들을 진료해주고도 치료비도 제대로 받지 않고 봉사정신으로 동물병원을 운영하고 있어서 문 닫기 직전이다. 그 여자는 연예인이 꿈이라서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것을 그 남자가 열심히 도와주고 있으며, 새 장모에게도 극진한 마음으로 모시고 있다. 그 여자는 시아버지에게 어버이날 냉면 대접을 하고 있다 등등.

첫날 방영이 되고 나서 우리를 알고 있는 전국의 시청자들은 분노해서 프로그램 댓글에 밤을 새워가며 세 딸을 부정하고 가정을 파탄 낸 사람이 총각행세를 하는 미친놈을 주인공으로 프로를 만들어 방영을 하느냐며 방송국은 욕바가지를 먹는 상황에 처했다.

 나중에 막내에게 들은 얘기로는 담당 피디가 그리스에 있는 딸에게 전화를 해서 딸이 맞냐는 질문을 하더란다. 왜 이런 전화까지 해서 마음을 긁느냐고 하니 1회 나가고 민원이 빗발쳐서 전화를 하게 되었다며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진실이냐는 것이었다. 맞다 엄마랑 이러저러해서 이혼한 게 맞고 세 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니 어떻게 생각하냐? 어떻게 생각하긴 아빠의 인생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면서 끊었단다. 그 아빠라는 인간은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대종 상감이라도 된다는 듯 CD를 막내에게 보내줬는데 받자마자 바로 쓰레기통으로 던졌단다.

 딸의  친구들은 광분해서 밤을 새워가며 댓글을 달았는데 그 남자는 돌아가신 시어머니 주민번호까지 도용해 아이디를 만들어 반박을 했다는 후문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무진 애를 썼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 남자를 이해해보려고 했던 내 마음은 사람이기를 거부하는 인간을 더 이상 측은하게 바라보지 않기로 했다. 애들 아빠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언론에 사실을 유포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후벼 파면 팔수록 딸들의 상처가 깊어질 것이며 앞날이 걱정되는 것이다.


 장남이라는 굴레 속에서 부모들의 끝도 없는 욕심을 이겨 내기 힘들었고 형제들과의 괴리도 어깨를 짓눌렀을 것이다.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그의 일탈을 불렀고 걷잡을 수 없는 한순간의 타락이 20년 넘게 노력해온 정교수의 꿈도(그 당시 조교수였고 정교수 진급이 남아 있었다.) 물거품이 되고 열정으로 가르쳤던 해부학은 그에게서 떠났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동물병원을 개업해 성공한 친구들을 보면서 뒤늦게 수의사로서 행보를 하지만 유능한 수의사 노릇은 하지 못했다. TV를 대한 일부 사람들은 그곳에 가서 수술도 받고 했던 모양인데 낫질 않고 악화되었다. 손님은 다른 병원에 가서 진료하면서 뱃속에 들어 있는 수술용 거즈를 꺼냈다는데 그 남자의 절친 아들이 수의학을 전공해서 실습 나갔던 부산의 유명한 모 동물병원 원장이 한 얘기라고 전해준다. 그 동물병원은 연로하신(?)  우리 호야가 눈이 아플 때 마지막으로 치료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개의 수명을 사람 수명으로 환산하면 그때 호야의  나이가 16세가 넘었다. 102세 정도여서 우리가 가끔 '할아버지, 할아버지' 부르기도 했다. 그러면 '뭔 소리냐?' 물끄러미 바라보며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던 호야와의 그리운 추억의 한 페이지이다.

  또 우리 가족을 모르는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인간극장에 비친 그 남자를 보고 이 시대의 진정한 로맨티시스트라며 좋아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참 세상은 우스운 곳이지?


 아이들이 며칠 동안 그 프로에 대해 신경을 쓰고 마음 다치는 것에 화가 난 나는 친구가 알아낸 전화번호를 받아 담당 피디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를 입고 있는 줄 아느냐? 당장 방송 중지를 하면 좋겠다. 거짓된 것을 미화시켜서 만든 프로가 버젓이 방송을 타는 것이 역겹다고 했다. 담당 피디는 변명을 늘어놓았고 이렇게 후폭풍이 심한 것은 처음 본다면서도 방송을 내리지는 못한다고 한다.

 방송국 피디로 있는 분이 생각이 나서 전화로 알리고 방송 가처분 신청을 하면 어떻겠냐고 물어봤다. 그분은 방송국 자체에서 만든 프로가 아닌 외주업체에 도급을 줘서 만들었기 때문에 방영 중단이 안되며, 가처분 신청은 과정이 시일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방송이 끝난 다음이 될 수가 있어서 소용이 없다는 말을 전해줬다.

 다시 한번 뻔뻔한 그 인간에 치를 떨고 말았다.




 다시 큰 딸 얘기로 돌아가서 답답한 마음이지만 그래도 자식인데 돌봐줘야지 하는 생각에 먹을 것이며 입을 것을 틈틈이 챙겨 주기에 바빴다. 그러니까 도와주는 장모가 곁에 있다는 생각을 해서인지 사위는 일을 안 하고 매일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피시방에 가서 밤을 새운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말다툼을 하고 얻어맞았다는 딸의 얘기에 순간 어디서 폭력을 행사하는 거야? 폭력을 휘두르는 놈 하고는 살 수가 없지. 안 그래도 이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어디서 손을 대? 화가 치밀었다. 딸이 엄마인 내게 잘못은 했어도 저희  둘이 좋아서 애 낳고 살면서 서로 노력해서 잘 살아야지 뭔 짓인지 참.


 그래서 오피스텔로 데려 왔다. 당분간은 옆에서 지켜보겠다는 생각으로 딸과 손녀를 데려다 놓았지만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다. 딸에게 손댄 것은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고 잘 살아 보겠다며 다짐을 하고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지 않은가 말이다.

딸을 집에 두고 계속 보험 일을 했고 그 해에는 싱가포르 여행이 보상으로 주어졌다. 부산과 가까운 제주도도 한 번 못 가본 내가 난생처음 해외여행을 했다. 나의 외국여행은 전부 보험회사에서 보내줬다. 몇 년 뒤엔 대마도를 갖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라스베이거스를 다녀오기도 했다..

큰 애는 큰 애 대로 생각이 있는지 이혼을 했고 우리는 좀 넓은 빌라로 이사를 했다.


이제 내겐 막내딸을 데려 오는 일만 남았다.

보험회사의 여름휴가 기간에 맞춰서 일정을 짜고 그리스로 떠났다. 딸은 엄마가 힘들까 봐 항공권 구입하라고 또 유로를 보내왔다. 무슨 말을 하리오.

가기 전에 네일숍 사장이 한국의 어묵탕을 먹고 싶다는 말에 어묵을 종류별로 준비하고 멸치육수를 낼 재료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그리스로 갔다. 11시간을 날아가서 독일 뮌헨에서 얼마간 기다리다가 환승을 하고 3시간 후 밤에 그리스 아테네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스에서 힘들게 지내는 딸에게 한인교회를 다니면서 한국으로 나올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라고 했을 때 막내는 반발을 했다. 같은 한국사람들이 신고하고 더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난 이해를 못했고 화를 내는 딸에게 길게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내가 데리러 갈 수 있을 때까지만 어떻게든 참고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네일숍 사장과 그 남편인 그리스 남자가 아이에게 한국 나갈 것을 차단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거짓말로 딸을 세뇌시켰기 때문이었다. 딸은 쌀밥이 먹고 싶어서 교회를 찾아갔고 한국사람들  만난 이야기를 하게 되니 원천 봉쇄를 한 것이다.

  후에 딸은 다시 한인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좋은 분들을 만나 교류하고 있었다.  그리스 영사관에서 일하는 분과 외국어대학의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 또래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공항엔 한인교회의 집사님 부부와 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은 그리스의 기후로 인해 거무스레 타기도 했지만 표정이 밝지가 않았다. 마치 도축장에 끌려가는 동물처럼 어두웠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그랬을까? 마음이 찢어졌다. 한인교회 집사 내외분이 차에 짐도 실어 막내가 지내는 아파트에 데려다주셨다. 사장 집에서 함께 거주하고 있었으니 이 아이도 샵에서는 직원이면서 집에서는 도우미 노릇도 했겠구나 생각하니 속이 아팠다.

 주인 부부는 외출 중이었고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막내와 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으면서 어묵탕도 끓여 놓았다. 엄마와 딸은 불안 불안한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들이 돌아왔고 인사를 나눈 뒤에 딸을 데려가겠다고 했더니 'ok, ok'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말을 한 뒤에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나갔다.

막내는 그때부터 더욱 불안해했다. 그렇게 쉽게 가라고 말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딸에게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해가며 을 붙잡아 놓고 일을 부려 먹은 사람들인데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막내는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그들이 막내를 불러서 얘기를 하고 막내는 내게 통역을 했는데 우선 엄마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고 딸은 예약 손님이 있으니 며칠 더 묵으면서 마무리하면 보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아니, 데려가겠다고 하니 여권도 없이 어딜 갈 수 있냐는 식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그 말을 해놓고 그들은 휴가를 떠났다. 여권을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은 중개인에게 돈을 줘서 여권을 돌아갈 수 있는 것으로 바꾼다며 딸에게 돈을 몇천 유로를 받아내며 주인 부부가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우린 꼼짝없이 발이 묶이게 되었다.

우선 공항에 가서 돌아가려고 예약해 놓은 항공권을 취소하고 일주일 뒤에 갈 수 있는 날을 잡아 다시 예약을 했다. 낮에 신 집사 부부가 우리를 초대했고 영사관에서 근무하시는 이 집 사라는 분도 함께 자리했다.

얘기를 들어 보시더니 어차피 여권은 기한이 지나서 사용할 수가 없을 테니 여권 분실 신고하고 임시여권을 만들기로 했다. 한국 여권은 아주 비싸게 팔리기 때문에  나중에 여권을 받으면 영사관에 제출하라고 다.

역시 신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열심히 교회 다니며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고 막내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삶이었는데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주고 계신 것이다.




 일주일 후에 도착한 주인 여자는 짐을 옮기는 딸과 나를 쫓아다니며 욕을 퍼부으며 성질을 부렸다. 머리 끄덩이를 확 뽑아 버리고 싶었지만 키도 작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폭력은 안되지. 나도 지지 않고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악을 썼고 영사관에 가서 일인시위라도 벌여서 내 딸을 되찾고 말겠다. 여권을 주지 않으면 폴리스에 전화할 테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 여자가 알아들을 만한 폴리스를 사용했더니 남편에게 전화해서 오라고 했다. 우리가 짐을 다 옮겼을 때 남자가 와서는 여권을 줄 테니 집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딸에게 들어가면 폭력을 쓸지 모르니 들어가지 말고 문을 열어 놓고 여권만 달라고 했다. 문을 열어 놓고 씩씩거리며 서 있는 나를 흘끔 보더니 딸에게 여권을 준다.

아파트 밑에서는 딸의 짐을 대강 차에 싣고 집사 내외분이 여차하면 전화를 하라고 하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내려가니 별일 없었냐면서 안도의 숨을 쉬었다.


  신 집사님은 하루 자고 떠나라며 우리를 집으로 데리고 가신다. 그들이 없는 일주일 동안에 교회도 나가고 아테네 구경도 하면서 제대로 웃을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지낼 때 그분들은 우리를 섬 투어 패키지여행도 시켜 주고, 양고기 잘하는 집에 가서 밥도 사주었다. 막내 말을 빌리면 그들은 한국에서 들어오는 학생들을 한결같이  융숭하게 대접을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스에서 적응을 잘할 수 있도록 시간과 돈을 투자해주시는 분들이었다.   

 신 집사님과 잘 지내게 된 연유도 관심 갖고 우리 애를 유심히 바라 봐준 데에 있다. 한두 번 교회에 나왔는데 어느 날부터 통 보이지 않았고, 무슨 말 못 할 사정이 있는지 표정이 어두워서 마음이 쓰였다고 하셨다. 기다리다가 막내와 친하게 지낸 학생에게 연락을 해보라고 해서 그 학생이 막내에게 와서 하룻밤 자면서 사정 얘기를 하게 되었고, 같은 민족끼리 신고하고 그런 게 어딨냐, 어려운 일에 도우면 도왔지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을 듣고는 그 사람들이 감시하기 때문에  못 나갔던 교회를 다시 나가기 시작했고, 엄마 없는 하늘 아래서 그들을 부모처럼 여기며 잘 지내고 있었다. 부모가 아니면 간섭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많이 안타까웠다는 말을 고 그분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세주라는 생각을 했다. 받은 여권은 영사관에 제출했다.

직항이 없어서 한국으로 돌아갈 때도 독일을 경유해서 가야 했는데 독일이 까다로워 입국 시에 임시여권에 대해 물으면 그리스 관광하다가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얘기하라고 일러 준다. 딸은 독일을 떠날 때까지 또 마음을 놓지 못했다. 입출국 시에 우릴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스에서 발이 묶였던 막내딸을 5년 만에 데리고 개선장군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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