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이고 싶은...

지금은 추억이 된 이야기

by 안신영

수척해진 모습으로 마중 나오신 선생님을 뵈니 안타까운 마음부터 든다.

"우울해하지 마시라고 제가 기쁨조 하려고 왔어요."

"감기가 왔어. 삼일 됐는데 어릿어릿해."

"감기 드셨다고 했으면 안 왔을 텐데..."

말뿐이지. 그랬으면 아마도 죽을 끓여 당장이라도 달려왔을 것이다.


가을볕이 좋아서 소나기마을 황순원문학촌에 들러 도시락도 먹으며 음악도 들으려고, 커피도 내려 보온병에 넣어 준비하며 소풍 가는 아이처럼 설레기도 한 아침이었다.

"점심을 먹고 들어 갈까?"

"아뇨. 몸도 안 좋으신데 집에 가서 도시락 먹어요. 도시락 싸왔어요."

"그럴까?"

"뭘 이리 무겁게 들고 왔냐?"

"그건 순전히 선생님 선물."

"뭔데?"


"여기 햇볕이 좋다. 밖에서 먹을까?"

식탁에 도시락을 꺼내고 있는데 돗자리 찾아 바깥뜰에 펼치시는 선생님.

뒷 뜰에 깔아 놓은 돗자리 위에 식탁보를 내려놓는다.

고개를 들어 올려 보니 산꼭대기로부터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어 내려오고 있다.

"언제 저렇듯 물이 들었지? 몰랐네."

물든 산을 보며 곱다, 예쁘다 외에 뭐라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름다워.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유부초밥, 단호박 영양밥에 디저트 겸 토마토 샐러드."

"와... 술이 없으면 안 되지. 건배!"

막걸리를 한 잔 따라 건배를 한다. 가만 보니 선생님은 술을 즐기시는 분이다. 감기 신대 어쩌나 염려가 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드신다면 괜찮으시겠지.

음악을 빼놓을 수 없는 순간.

"선생님과 들으려고 준비한 음악이에요. 먼저 선생님 20대 때의 추억을 떠올리실 탱고 아다지오."

둘째가 선물한 휴대용 스피커를 스마트폰에 연결한 뒤에 보관함에서 음악을 찾아 플레이.

'아~이런 산속에서 탱고 음악이라니.... 정말 좋다."

"안신영이니까 할 수 있죠. 후후~"

숲 속 산막 뒤뜰엔 따사로운 가을 햇살과 살며시 불어대는 미풍으로 한들한들 춤을 추며 내려앉는 낙엽과 함께 하나의 풍경이 되어 시간은 흐른다.

"점심 잡숫고 약 드시고 푹 주무세요. 감기엔 잠이 최고예요."

지난달에도 감기로 고생하셨는데 또다시 감기. 얼마나 속을 끓이셨으면....

엊그제 서울 나들이로 밤늦게 귀가하시다가 덕소 플랫폼에서 오래 서 계신 탓에 한기가 든 뒤로 코감기시란다. 나도 오늘은 덕소행을 타는 바람에 다시 갈아탄다고 한참을 서 있었는데...

코감기라면 10여 년 전에 지독히 앓았었지.

암투병으로 입원 중에 계신 시어머님 계신 병원으로 매일 출퇴근하다가 들린 감기가 나중에는 코감기가 걸려 무척 고생했다. 두 달여를 앓았는데 후유증으로 몇 년간 냄새를 맡지 못해 냄비도 많이 태웠던 기억이 난다. 냄새를 맡지 못해 부자가 울려 소리 나는 주전자, 타이머를 사용하기도 했다.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리베르 탱고가 나오자

"어! 이건... 음... 피아졸라."

"맞아요. 아시네요?"

"친구였어. 친했어. 재주가 많은 친구였지. 못하는 악기가 없었어."

"그분이 프랑스에서 공부하셨어요? 아르헨티나 태생. 부모가 미국으로 이민 갔어요. 후에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서 기존의 탱고보다는 자유로운 독보적인 리베르탱고를 만들었죠."

음악을 들으며 함께 얘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귀한가. 음악의 장르 구분 없이 좋은 음악이면 다 좋아한다는 것. 이해하고 공감하며 감탄하는 분위기를 얼마나 고대하며 기다렸었나.

지난 수요일 저녁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면 '주말에 선생님 뵈러 갈게요'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은 분명한 일. 바쁘신 선생님께서 산막으로 초대하지 않으시면 감히 선생님 뵐 생각은 하지 못한다.


천천히 도시락을 먹고 나서 선생님은 밤 주으러 가지며 장화를 들고 오신다.

"이곳엔 뱀이 많아. 혹시 모르니까 장화 신어."

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커다란 장화에 넘어질 것 같은 몸을 가누며 선생님 뒤를 쫓아간다.

지난번에 만들어 놓으셨다는 옥녀탕을 가리키며

"저거 만들어 놓고 한 번도 사용 못했네."

"여름 내 외국에 계셨으니, 내년 여름에 쓰시면 되겠네요."

낙엽들을 집게로 헤치며 알밤을 꺼내신다. 낙엽 속에서 가끔 알밤이 방긋 웃는 아이처럼 나타난다.

"밤이 많았었는데 이제 안 보이네. 다들 주워 갔나 보다."

"그렇겠죠. 사람들이 그냥 둘리 있겠어요?"

낮은 물속에 떨어진 동글동글한 도토리만 자꾸 보이고, 내 앞엔 알밤은 보이지 않고 바늘 갑옷의 껍질만 수두룩하니 쌓여 있다. 나뭇가지 하나 주워 낙엽을 하릴없이 치우는데 기특하게도 알밤이 쏙 나타난다.

한 십여 개쯤 모아졌을 때, '한 번은 삶을 수 있겠다' 하시는 모습이 완전 동심이시다.

*사진이 별로. 유부초밥 먹다가 생각이 나서 찍었더니...

약기운으로 가뭇 거리는 정신의 선생님을 두고 돌아 올 수도 없는 난감함에 부딪힌다.

"참 선물이 뭐야? 갖고 와봐."

"까뮈 하고...."

"귀한 술을? 이 산속에서 프랑스 술이라니..."

"한 숨 자고 강가에 갈까? 잠 못 잤다며 그대도 자."

"잠이 오면 잘게요." 어제 그제 거의 뜬 눈으로 지냈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 중에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나오니

"어렸을 때 좋아하던 노래야. 도밍고?"

"아뇨. 이건 파바로티. 도밍고도 있어요. 끝나면 들려드릴게요."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끝나고 플라치도 도밍고로 같은 노래를 듣는다. 도밍고의 목소리가 더 파워 플하 게 들린다. 영국의 팝페라 가수 이지의 노래로 연결하면서

"여가수의 노래는 어떤 느낌인지 들어 보세요."

"참 많이도 찾았네. 장르도 다양해."


가수면 상태로 앓고 계신 선생님 곁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비로소 숨을 제대로 쉬는 것 같음을 느낀다. 눈을 들어 밖을 보면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이 보이고, 바람결에 나부끼는 나뭇잎 사이로 지저귀는 새소리. 아! 난 비로소 숨을 쉬는 느낌이다. 이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 그래.... 나를 쉬어줘야겠다. 당분간이라도. 서울 생활을 접고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힌다.

이 산막에 잘 어울리는 첼리스트 요요마의 리베르탱고도 흘러간다. 엠마 샤플린의 청아한 고음이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구름이 지나가는지 갑자기 숲 속이 어슴푸레해진다. 이 한낮에 숲은 수시로 몸 빛깔이 변하면서 분위기가 순간순간 새로워짐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 여가수 아그네스 발차의'ToTreno...'가 지나가고 조수미의 번안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가 애절하게 산막을 울린다.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앤딩이 '그대여'를 수없이 부르더니, 몬타나의 사계절을 잘 나타낸 윌리엄 애커맨의 기타와 팬플릇의 연주가 예전의 느낌 그대로 내 가슴을 두드린다. 십 년도 넘었는데 음악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고 음률에 사로잡혀 가슴이 울먹해지는 감동을 느끼게 하는 위대함이 있다.

'Prossional(행렬)'은 아마도 철새의 무리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갈 때 지은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러기든지 오리들이 일렬종대로 하늘을 날아갈 때 위대한 자연에 숙연해지는 마음이었으리라. 몬타나는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윈드햄 힐에 함께 소속한 죠지 윈스턴도 피아노 연주로 사계절을 뚜렷하게 표현한다.


뒤척이던 선생님

"아, 음악소리가 비몽사몽..."

"음악을 끌걸 그랬나 봐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며

"아냐. 괜찮아, 잠 좀 잤어? 못 잤지?"

"흔들리는 나뭇잎들 보고 있었어요."

"그래, 아침에 눈을 떠서 그대로 한 30분은 나무들을 바라보는데 참 좋아."

"그럴 것 같아요. 바라만 봐도 정말 좋아요."

"더 늦기 전에 바람 쐬고 오자."

"괜찮아요. 몸도 안 좋으신데."

"갑갑해. 여긴 빨리 어두워 지니까. 얼른 다녀오자."


괜히 소나기마을 얘기를 했어. 후회막급. 컨디션이 점점 안 좋으신 선생님 결국

"자기가 삐치더라도 내가 그 얘기(돈 빌려 달란 얘기)만 안 했어도 오지 말라고 했을 거야."

(저도 그래요. 선생님. 그래서 제가 오늘 온 거예요. 비록 도움은 못 드렸지만 시일이 너무 지나면 서먹하게 될까 봐서요. 초대하시기 전엔 못 오는데 제가 온다고 말 안 하면 그대로 선생님과는 너무 멀어질 것 같았어요.)


같이 오래 있으면 내게 감기 옮게 될까 봐 걱정이신 선생님을 뒤로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서울로 향한다.

"감기 안 걸려요. 지난번에 앓고 나서 면역력이 생겼어요."

"몸이 약하잖아. 정말? 100% 안 걸리지?"

"넵!"

아픈 선생님을 두고 홀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 쓸쓸하다.

*photo by 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