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올린 도래울 마을과 이신의 선생에 대해 쓴 글이 미진한 것 같아 첨가할 것이 없나 그 동네를 둘러보기 위해 나섰다. 이신의 선생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 장로님께 들은 이야기로는 마음이 흡족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도래울 마을까지는 우리 집에서 5km 정도 되는데 아침 산책의 거리 치고는 멀지만 피곤하면 버스를 타고 돌아 올 생각으로 걷는다.
*뱀딸기, 메꽃.
창릉천 길을 걸으면서 풀꽃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푸르른 이 계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예쁜지, 너희 풀꽃 요정들이 반겨주니 심심치 않다면서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말을 걸어 본다.
행주산성 방향으로 걷다 보면 몇 개의 공원을 만난다.
달걀 부리 마을 건너편 솔바람공원과 반려견 놀이터가 보이고, 한참을 걷다 보면 자전거 도로가 행주 산성길로 연결되어 그 길 따라 뚜벅뚜벅 걸어간다.
*감자꽃, 쑥갓꽃.
분명 이신의 선생이 단(壇)을 지어 놓고 제를 올리며 군사들을 지휘하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는 단(壇)이 이 마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버스를 타고 움직일 때 누각 같은 것을 얼핏 보았던 느낌적인 느낌을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걷는다.
걷다 보니 도래울 수변공원이 보이고 자유로가 시작되는 길까지 천변을 내려다보며 선형공원이 있다. 둑엔 금계국이 노랗게 웃음 지며 바람결에 흔들리는데 창릉천엔 왜가리와 가마우지, 청둥오리가 서로 내외라도 하는 듯 멀찌감치 떨어져서 각자의 모습을 풍경으로 남긴다.
*왜가리, 가마우지, 청둥오리.
앞으로 더 진행하면 이케아와 이신의 선생 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단(壇)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아 선형공원으로 올라서서 수변공원 방향으로 걸으며 내 눈은 빠르게 고개를 좌우로 돌려본다.
도래울 수변 공원을 걸으며 안쪽으로 기웃거려본다. 원흥 저류지에 둘레길을 만들어 놓아 몇몇 사람들이 조깅을 하고 산책하는 것이 보이면서 나무 사이에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류지 건너편에 누각이 보여 빙 둘러쳐진 둘레길을 따라가니[의장대 공원]이라는 표지석이 입구에 있다.
누각 가까이 가니 의장대(義將臺)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의장대 유래에 대해 적은 표지판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의장대 유래는 다음과 같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이신의 장군은 창릉천 강 거너 구파발, 서오릉 쪽에 진을 치고 호시탐탐 고양의 양민들을 헤치거나 노략질을 위해 출몰하는 왜적들의 동태를 살피고 의병을 지휘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이에 장군은 창릉천 강가에 있는 해발 약 50미터 정도의 나지막한 도라산을 적절한 장소로 정하고 야산 정상에 가로 20미터 세로 10미터가량의 터를 닦고 터 위에 돌을 쌓아서 높이 2미터 정도의 단(壇)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돌단 위에 왜적과의 싸움에 대비할 지휘소를 누각 모양으로 짓고, 의장대(義將臺)라 불렀다, 지금은 도시개발과 아파트 단지 조성을 위해 훼손되고 없는 이곳 도라산 옛터에 이신의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리고자 고양시에서는 의장대(義將臺)를 복원하였다.
도라산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어 여기에 옮겨 본다.
이곳 '도래울' 마을의 지명은 도라산과 창릉천 강가에 자리 잡은 '석탄촌{돌석石 여울탄灘 마을촌村)' 즉 돌 여울 마을이다. 그 유래는 문정공(文貞公) 석탄(石灘) 이신의(李愼義, 1551~1627) 선생의 아호를 따서 지명을 석탄촌이라 했다. 이후 역사적 배경과 세월이 흐르면서 "도내동"으로 변천하게 된 것이다.
선생은 1592년 당시 [도래울] 마을에서 행촌 민순 선생의 문인으로 학문에 힘쓰고 있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래울 마을과 인근 지역에서 향병 300여 명을 모집 이신의 창의대( 李愼義 倡義隊)를 조직하고 한강변, 행주산성 주변에서 왜적과 싸워 물리친 고양의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지휘소, 의장대
도라산의 의장대는 이신의 의병장이 창릉천 건너에 진을 치고 잇던 왜적들이 고양지역을 약탈하거나 침범할 수 없도록 막아내기 위한 전략 지휘소로 마을 사람들과 의병들에 의해 세워졌다. 창릉천 나지막한 도라산 정상에 자리 잡은 의장대에서는 왜적과의 싸움에 대비하고, 유격전 계획을 수립하는 등 마을 원로들과 향병 지도부가 전략을 세우는 의병 지휘소로 이용되었다.
이와 같은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적 사실은 1700년(숙종 26년 2월,. 마을 사람 윤식(尹植)에 의해서 의장대시서( 義將臺詩序)라는 600여 건의 글이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알려지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장대비(將臺碑)가 세워지다.
행주대첩의 대승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세월이 흘러 당시의 역사가 잊힐 무렵 1740년 (영조 16년) 초, 의병부대 '이신의장의대(李愼義將義臺)'를 기리는 장대비가 윤식(尹植), 장해익(張海翊)과 마을 사람들에 의해 도라산 기슭에 세워진다.
후세에 이르러 고양시는 역사적, 교육적 큰 가치가 있는 이신의 선생 묘역 및 신도비, 장대비는 향토문화재로 지정 보존하고 있다.
왜적이 침입할 때마다 이신의 선생과 뜻있는 주변 사람들은 내 고장,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싸우며 마을과 양민들을 지켜냈다. 또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호국정신과 훌륭한 업적을 잊지 않고 장대비(張臺碑)를 세워 기리는 일로 후세까지 알려지도록 했다.
이렇듯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 내려오는 고장에 살면서 정확하게 알고 싶은 마음에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겨 찾아다닌 보람이 있는 흐뭇한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