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방색으로 나눈 꿈의 대화
부암동 창의문 옆, 창의문 뜰 한옥 갤러리 카페에서 만난 그림들은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선을 붙잡는다. 정갈한 한옥 공간과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진 공간은 그림을 과하게 꾸미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이 스스로 말을 걸 수 있도록 한 발 물러서 있다.
9월의 전시는 화가 함미자의 ‘꿈의 대화’ 시리즈로 채워져 있었다. 오방색을 바탕으로 한 화면은 화려하지만 산만하지 않고, 오밀조밀한 구성 속에서도 질서가 느껴진다. 특히 ‘21 장생’ 연작은 전통 민화의 십장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작가의 작업 세계를 가장 잘 보여준다.
함미자는 전통 민화 속 십장생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욕망과 바람을 반영해, 기존의 열 가지 장생물에 세계 각국의 행운 상징을 더했다. 해바라기, 흰 코끼리, 연꽃, 네 잎클로버, 황금 잉어, 숫자 8, 터키의 나자르 본주까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상징들이 한 화면 안에서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공존한다는 점이 인상 깊다.
그림 속 배경 역시 흥미롭다. 산과 호수 같은 자연 풍경 위에 골프장이 등장하고, 전통 한복을 입은 인물들이 필드 위를 거닌다. 서구 스포츠인 골프와 한국적 정서의 결합은 자칫 가볍게 보일 수 있지만, 작가는 이를 해학적으로 풀어내며 ‘행운’과 ‘일탈’이라는 주제를 설득력 있게 끌고 간다. 화면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 웃음은 가볍지 않다.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찾아보는 재미’가 생긴다. 어디에 어떤 장생물이 숨어 있는지 하나씩 발견하는 과정에서 관람자는 수동적인 감상이 아닌 적극적인 참여자가 된다. 이 점이 이 전시의 강점이다. 그림을 읽는 방식이 강요되지 않고, 각자의 바람과 기억을 겹쳐 볼 수 있도록 열려 있다.
전 세계가 전쟁과 기후 위기, 팬데믹의 기억으로 지쳐 있는 지금, 이 작품들은 지나치게 무겁지도, 공허하게 밝지도 않다. 오방색의 생기 있는 화면 속에는 “잘 되기를 바란다”는 단순하지만 절실한 소망이 담겨 있다. 그 메시지는 관람자에게 조용히 전달된다.
함미자 화가는 오랜 시간 단청 기술자로 활동해 온 이력답게 색에 대한 감각이 단단하다. 오방색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작품의 정서와 구조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로 작동한다. 화려한 색채 속에서도 화면이 안정감을 잃지 않는 이유다.
‘꿈의 대화’ 시리즈는 작가 개인의 바람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랑, 건강, 평안, 행복이라는 보편적인 욕망을 담아내며, 관람자 각자가 자신의 삶을 투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래서 이 전시는 보고 나면 설명보다 여운이 먼저 남는다.
이 전시는 그림을 통해 거창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잠시 멈춰 서서, 지금 내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조용히 생각하게 만든다. 그 점에서 ‘꿈의 대화’는 성공적인 관람 경험이었다.
*photo by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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