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마스크

by 안신영


학교에서 돌아와 대문을 들어서면 돌돌돌, 자르르 자르륵... 리드미컬한 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니께서 재봉틀을 돌리는 소리다. 아! 아버지 마스크를 만들고 계시는구나.


재봉틀을 사고 어머니께서 이것저것 생활에 필요한 것, 간단한 월남치마라든가 한복저고리도 만들어 깔끔하게 입곤 하셨는데 엄마는 도회지 생활을 하시면서도 한복을 즐겨 입으셨는데 한복은 어머니의 미모와 아주 잘 어울렸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하얀 소창이라고 하는 천을 떠다가 재단을 하시더니 큼지막한 마스크를 만들기 시작하셨다.


소창은 지금의 거즈천이라고도 불리는 아주 부드럽고 성긴 짜임이라서 얼굴에 하고 다닐 때 답답하지 않고 숨도 원활하게 쉬게 되는 좋은 천이 기도 하다.


약국에서 방한 마스크라고 파는 마스크는 엄마가 만든 것보다 크기가 훨씬 작다. 엄마가 만드신 마스크는 얼굴을 절반 이상 가려 줄 수 있는 크기의 마스크다.



아버지는 외출 시에 평생을 마스크를 하고 다니셨다.


아버지의 오른쪽 볼은 적색 피부암으로 인해 붉은 자줏빛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어릴 적 아버지의 모습은 희미하다. 우리가 커서 나중에 눈에 익은 아버지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버지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든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끔 집을 비우시는 일이 많아서 남동생과 엄마와 셋이서 지내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얼굴을 뚜렷하게 기억을 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아버지가 젊으셨기 때문에 적색 피부암은 그다지 심하지 않으셨다. 나이가 점점 드시면서 적색 종도 얼굴을 덮는 수준으로 자랐다.


아버지가 오셔서 함께 네 식구가 살게 된 것은 8살 학교에 입학할 무렵이다. 동생이 부천 성모병원에서 6개월을 입원했다가 퇴원을 하고 시골 외갓집으로 돌아와 지내고 있던 중 어느 날 밤에 아버지께서 오셔서 할머니 앞에서 무릎 꿇고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죽을 몸입니다.” 하시며 통곡을 하고 계셨다.


엄마는 동생을 집에 데려다 놓고 병이 나서 몇 개월째 거동도 못하고 누워 앓고 계셨다.


외할머니 댁으로 올 때 하얀 눈을 밟았던 겨울이 여름도 지나 다시 겨울이 되었을 때의 일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외할머니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시던지.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말씀하시며 이제는 돌아왔으니 됐다고 하셨다.


그렇게 밤 깊도록 말씀 나누시다가 정리할 일이 있어서 다시 다녀오겠다고 하시곤 떠나셨다.


얼마 후 돌아오셨지어도 윗마을에 큰 집이 계시지만 그곳으로 가지 않고 외갓집과 가까운 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온 가족이 모여 가정을 꾸리고 새 삶을 의욕적으로 사셨다. 건강도 회복하신 엄마도 늘 웃음이 떠나지 않으셨다.


마당엔 토끼장이 즐비하여 매일 토끼를 볼 수 있었고, 동생과 풀도 뜯어다 주기도 하면서 즐거운 생활을 했다. 어린 마음에도 가족은 이렇게 사는 것이구나 생각을 하면서.


큰아버지께 아버지 몫을 받아 농사도 조금 지으셨다. 젊은 시절을 도회로 떠돌던 분이 농사에 집중하셨을까? 애들은 서울서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했다.



어린 우리들이 아버지의 내면적인 고민과 고통을 어떻게 알까.


가족인 우리는 늘 함께 지내다 보니 아버지의 얼굴이 너무나 익숙해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 까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얼마나 철이 없으면 초, 중, 고교.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 적령기에 들어서서야 아버지 얼굴 때문에 반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동생 둘과 나는 신체 어느 부위에도 적색 종이 없다. 깨끗하다.


그런데 유전학적으로 보면 3대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고통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기 위해 마스크를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나 사철 하고 다니시면서 여름엔 더워 고생하시고, 겨울엔 입김이 안경을 덮어 앞을 가릴 때가 많지 않은가.


가족들 부양하신다고 책임을 다하시면서 짬짬이 취미활동을 하셨는데 노장 마라톤, 사이클, 노래 감상하며 따라 부르기를 좋아하셨다. 노래를 워낙 좋아하셔서 대중가요 LP 레코드가 우리 집에 엄청 많았다. 어렸을 적부터 들은 고복수, 이난영, 김인수, 백야성, 이미자, 배호. 문주란.. 남진, 나훈아..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레코드가 많았고. 웬만한 노래는 지금도 어디선가 흘러나오면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다. 어린 마음에도 경쾌한 노래가 좋았던지. 백야성의 ‘마도로스 도돔바’란 노래를 잘 따라 불렀던 것 갔다.


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평생 하셨고, 노장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셔서 잠실 주경기장을 완주하신 분이기도 하다. 그때 기뻐하시는 모습을 곁에서 바라보진 못했지만(결혼으로 부산에서 살았기 때문)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표정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했다. 얼마나 뿌듯하셨을까. 마라톤은 자기와의 싸움이며 극기의 결정체 아니던가.



한 번은 마라톤 대회로 인해 부산에 오셨는데 시집살이하는 나를 보러 오셨겠지만 사위가 십이지장궤양 수술을 했기 때문에 한약을 몇 제 지어 갖고 내려오신 것이다. 강의하다 쓰러져 옆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옮겨 바로 수술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비행기를 타고 내려오셨던 아버지이시기에 몇 개월 뒤에 오시는 기회에 여행가방 가득히 한약을 넣어 오셨던 것이다.


외모로 인해 평생 고통 속에 사셨어도 우리에게는 내색 한 번 없으셨던 아버지. 피부암의 일종이지만 통증은 없었기에 생활하시는데 불편함이 없으셨다. 남들보다 뭐든 열심히 하셨다. 마라톤도 하셨지만 동생들과 함께 사이클을 자주 하셨는데 영등포에서 수원까지 장거리 사이클을 하기도 하셨다. 결혼해서 잠깐 수원 서울농대 옆에 산적이 있는데 손녀딸이 보고 싶다고 자전거로 운동 삼아 수원까지 오시는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 자신의 건강관리도 잘하셨다. 운동도 하시고 음식도 늘 싱겁게 드셨거니와 담배나 술도 안 하셨다. 약관의 20대 때도 몸에 안 받아 안 하셨다고 하셨다. 말 못 할 커다란 고통을 가슴속에 삭이며 평생을 보내신 아버지. 그래서일까?


그 당시에 사범대까지 들어갈 실력을 갖추셨던 분. 청년시절의 사진을 보면 아주 멋진 분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굴 때문에 그걸 고치겠다고 도시의 큰 병원마다 다니며 온갖 의술과 방법을 수집했지만 요즘의 의술과 천지차이이기도 하고 태어난 모습으로 살다 죽는 것이 더 일반적이지 않았을까? 아버진 나름대로 세상에 나가 도전을 해보셨지만 이뤄내시진 못하셨다. 그래서 나와 동생들을 잘 가르치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 마음을 헤아려 드릴 줄도 몰랐고 당장 나에게, 너에게 닥친 일이 중요해서 의견 충돌을 일으켜 많이도 아프게 해 드렸다.


아버지는 멋쟁이셨다.


여름 복중에도 긴 와이셔츠를 입으시고 양복을 입고 외출하셨다.


와이셔츠도 기성품은 입지 않으셨다. 거의 하얀색인데 핑크색도 푸른색도, 하얀빛으로 빛나는 옷감으로 항상 맞춤집에서 맞춰 입으셨다. 사철.


소매 부분도 단추로 여닫는 것이 아니라 카우스버튼을 항상 사용하셨다. 정장을 하고 나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 체격도 알맞고 운동으로 다져진 골격으로 인해 양복이 잘 어울려 정말 멋지셨다.


눈으로 보이는 외모부터 판단해서 수없이 많은 멸시를 받았을 것이며, 말로 표현을 안 해도 찡그리거나, 놀라는 표정으로 사람들은 아버지를 무시하고 얼굴을 돌렸을 것이다. 아버지의 마스크, 고집스럽게 더운 여름에도 양복을 누구보다도 정갈하게 입으셨던 아버지. 남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의 남다른 노력이 아니었을까! (2012. 9)


*photo by young.(손녀 율이 에게 만들어 준 마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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