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햇살이 곱던 어느 날, 여섯 살 단발머리 소녀는 마치 나비가 나풀거리듯 꽃잎처럼 부드러운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봄 길을 통통 튀듯 걷고 있다.
이른 봄 아지랑이 아른 대며 피어오르고 새싹이 돋아나 있는 봄 길을 어른 손에 이끌려 걸어가면서 목에 두른 스카프가 풀려 봄바람에 날아가 버린 줄도 모르고 깡충거린다.
소녀에게는 그 외출이 정말 오랜만에 바깥세상으로의 나들이였다.
동생이 다쳐 입원을 하여 병원생활을 하고 있던 소녀. 엄마와 동생, 소녀 세 식구는 시골의 집도 잊은 채 병원이 마치 집인 양 생활하고 있었다. 척추를 다친 동생은 기브스를 한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고 엄마는 간호를 하셨다. 침대 밑에 보호자와 가족이 쉴 수 있는 간이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는 생활, 벌써 수개월 째 하얀 병원 건물에서 간호사 언니들과 친분을 쌓고 회진 도는 의사 선생님들과 한 가족처럼 지내고, 아침이면 환자 가족에게 주는 강냉이 죽을 배급받아 오며, 우물가에서 물도 길어 오고, 엄마의 잔심부름도 하고, 병원 마당을 배회하기도 하는 것이 그 소녀가 할 수 있는 생활 전부였다.
같은 병실의 환자 가족들은 병원과 집이 가까워 자주 집을 오가기도 하고 자신의 집에 또래가 있다고 친구도 없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소녀에게 바람도 쐬어 줄 겸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간 것이다.
시골의 집을 떠나 온 지 계절이 바뀌어 봄이 오고 있었다. 엄마는 도회지에서 아버지가 사다 주신 스카프를 꽃샘바람에 감기라도 들까 봐 머리에 씌워 주신 것 같았다.
그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돌아온 소녀에게 엄마는 “어제 했던 머플러는 어딨냐”라고 물어보셨지만 소녀에게 ‘머플러’의 기억이 없다. 여섯 살 소녀에게는 환한 햇빛과 낯선 동네, 낯선 가정집에서 또래 아이와 함께 밤을 지내고 돌아온 기억 밖에는.
“에그 아까워라. 얼마 해보지도 못한 건데. 바람에 날려 갔나 보다.” 하시며 아까운 스카프가 못내 아쉬워 쓸쓸한 빛까지 감도는 얼굴이 되셨다. 직장 문제로 시골집에 정착을 못하시고 도회지로 나가셔서 가끔 들르시던 아버지께서 선물하셨던 스카프였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하는데, 요즘은 포장도 풀지 않고 버리는 물질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때엔 뻣뻣한 광목이나 조금 부드러운 옥양목으로 만든 보자기 같은 것으로 겨울엔 보온용으로 머리에 쓰고 다닐 정도로 물건이 귀했던 시절. 실크 스카프가 아니더라도 감촉이 부드러웠던 희미한 기억과 매듭이 잘 풀어져 없어지는 것도 느끼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도 요즘 흔한 폴리에스터로 만든 스카프가 아닌가 싶다.
금싸라기처럼 부서지는 봄 햇살을 받으며 이 봄에 어울릴 스카프를 만들기 위해 발걸음을 시장으로 옮긴다. 한복 원단과 각종 직물이 즐비한 시장으로 가는 길목엔 그 옛날 논둑길에서나 만났던 냉이와 돌미나리, 원추리 같은 봄나물이 한 무더기씩 자리를 잡고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며칠 후면 엄마를 만나러 간다. 계절에 맞는 질감과 문양의 천을 골라 화사한 스카프를 만들어 맨 먼저 어머니께 선물하고 싶다. 이번에도 엄마에게 가장 잘 어울릴만한 스카프를 해 드리면
“색이 곱다. 문양이 예쁘다. 지난번에 해준 것도 아직 많은데 또 만들어 왔냐?”라고 하시면서도 반기실 것이다. 하지만 예쁜 며느리에게 슬그머니 주시고는 내게 시치미 뗄 것을 나는 안다.
“엄마. 스카프는 많을수록 좋은 거예요. 옷마다 그 옷에 맞는 것을 하고 다니세요.” 하면서 이리저리 모양을 내면서 스카프를 매어 드릴 것이다.
스카프 만들어 선물하기는 오래전 엄마의 귀한 스카프를 잃어버리고 나서 시작된 향수 찾기가 아닐까?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에 진열되어 있지 않은 나만의 독특한 개성을 살리고, 생일이나 기념일 맞은 가까운 지인들에게 만들어 선물하고, 이 세상에 단 한 개만 있는 스카프라는 것이 가장 매력이 있는데, 스카프를 받을 사람에게 잘 어울릴 색상과 문양을 고르고, 선물을 받고 좋아할 사람들을 상상하며 만드는 재미는 백화점에서 사는 것보다 더 재밌다. 스카프를 우편으로 배달된 것을 받아 본 친구는 그 순간이 행복했노라고 전해주기도 한다.
엄마는 50여 년 전 그때의 기억을 하시기나 할까? 어렵던 시절, 의사 선생님이 회진을 돌고 간 뒤엔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 베갯잇을 적시던 4살짜리 동생의 창백한 얼굴, 20대 후반의 아리따웠던 엄마의 곱디고운 그 얼굴이 근심 속에서 눈물로 얼룩졌던 한 시절. 붙임성이 좋아 철없이 이 병실 저 병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나름 익숙하게 병원생활을 했던 소녀.
엄마는 아실까?
그 당시엔 몰랐던 많은 것들. 가족이기에 지금도 기억하면 가슴이 짠해오는 것들.
단발머리 그 소녀가 아직도 엄마의 스카프를 잃어버려 미안해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2012)
*photo by 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