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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Aug 14. 2024

알찬 하루, 저녁 산책

푹푹 지는 여름날, 밖에 나가는 일이 두렵기조차 하다.

웬만하면 약속을 잡지 않고. 휴무일을⁴ 온전하게 집에서만 지낸다.

요즘 같은 더위에는 해가 지기 전에는 한 발짝도 현관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미뤘던 여름옷을 뒤늦게 만든다.

애정하는 옷감들을 꺼내 놓고 매번 상상으로 벌써 몇 벌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몸은 굼떠서 잽싸게 만들지 못하고 이리 재고 저리 재며 궁리만 하던 나날. 드디어 옷본을 만들고 재단을 한다. 어깨끈을 달아 어느 옷에나 어울리는 상의를 만들고,  하의는 스커트로 작은 네 모 두 장. 큰 네모 두장을 원단에 직접 그리라며 옷본이 없지만 책에서 지시하는 데로 따른다.

상의는 짧은 셔츠나 티셔츠를 입고 위에 덧입어 멋을 부리면 될 것 같다. 한벌로 이으면 원피스 느낌, 따로 입으면 다른 느낌, 분위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 만들고 보니 제법 괜찮은 한 벌 옷이 만들어졌다. 상의 옷본을 참고하여 주름 없는 A라인 원피스를 한 개 더 만든 뒤에 허리를 펴준다.

휴우... 드디어 완성! 창밖은 이미 해거름에 어둑해진다.  내친김에 두 벌의 옷을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찾아 만들지만  아마추어는 힘들다.

이제 산책 나갈 시간이야.

햇살이 없으니 씩씩하게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밖은 걷기에 딱 알맞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탄천으로 나가는데 둑엔 이미 짙은 녹음의 나무들이 활개를 치고 둑 전체를 점령하고 있다.

매미의 합창은 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도 함께 화음을 넣어서인지 거리는 온통 합창대회라도 벌어진 것 같다.

매미들의 합창

어느새 가로등은 켜져 환한 불빛에 조깅을 나온 사람들과 산책하는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 본다. 맹꽁이도 지나는 여름이 아쉬운지 예서 맹, 제서 , 열심히들 화답하며 수풀 사이로 사랑의 아리아인지 멜로디가 퍼져 나간다. 30여분 오랜만에 탄천길 산책을 끝내고 예정대로 석촌호수로 향한다.

맹꽁이 노래.

지난 유월 석촌호수 서호 쪽을 거닐다가 신발을 들고 걷던 사람들을 본 적이 있어서 맨발 걷기 길이 있는지 확인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때는 일행이 있어서 다음으로 미룬 것이 훅~ 두 달 여가 되었다.

탄천엔 역시 황톳길은 없었고 서호 쪽에 있다면 성수동 친구네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면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내심 반갑다.

호수 데크길 위의 숲길 한가운데로 사람들 몇몇이 걷고 있다.

아, 저기로구나.

시작점 옆의 황토 반죽이 되어 있는 작고 둥근 마당에서는 네댓 명이 서서 제자리걸음으로 흙반죽을 다지며 건강을 다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곳엔 다음에 해보기로 하고 우선 걷는 것을 해보기로 한다.

성수동 둑길의 맨발 걷기 길처럼 마른땅이 아니어서 부드럽게 발 디디기가 아주 좋다.

밤이라서 어둡긴 해도 황톳길을 밝혀주는 불빛이 있어 걷는 데는 문제가 없다.

걷다 보니 중간중간 황토물 웅덩이가 있어 발이 쑥 내려 닿는다. 열 길 물속은 알 수 있다는 말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흙탕물속은 깊이를 알 수 없다. 다만 걷기 길이니 깊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으로 발을 살금살금 내딛으며 깊이를 가늠하며 안전하게 걸어 본다. 발을 잘못짚어 비틀, 아찔, 넘어질듯해서 긴장이 되기도 하며 조금은 재미스럽기도 하다.

마른땅 구간은 많지 않아서 발바닥에 박히는 마사가 별로 없어서 예전처럼 발바닥은 아프지 않아서 좋다. 다만 마른땅과 달리 미끄덩 거리는 길은 마치 빙판 위를 걷는 것처럼 미끄러워 넘어질까 봐 아찔하다.

넘어진다면 옴 몸이 흙반죽이 될 것이라 문제가 심각하지 않을까?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보니 320m의 끝, 발 씻는 곳에 다다른다.

황톳길 중간쯤에는  백제 한성기 21대 왕들의 이름을 새긴 왕명석이라는 돌들이  숲 속에 눕혀져 있다. 백제의 왕이었던 근초고왕 조형물이 불빛을 발하며 서 있는 것을 보며 옛날 이곳이 한성 백제 이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이 근처에 살면서도 역사적인 것은 염두에 없다. 사는 일이 바빠서(?). 이곳이 유서 깊은 곳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이 한반도  어느 곳 하나도 유서 깊지 않은 곳이 없으랴마는 특히 서울의 한 복판에서 현대를 어우르며 존재하는 옛것을 잊지 않고 기리는 조형물과 왕명석을 바라보는 것도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photo by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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