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장면은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대웅전까지 이어진 경내의 완만한 언덕, 그 길목에 세 개의 동상이 서 있었다. 눈을 가린 모습, 귀를 막은 모습, 입을 다문 모습. 익숙한 형상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유난히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동상 아래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짧은 문장으로 새겨져 있었다.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라는 듯, 지나치는 사람의 마음을 붙잡아 세운다.
불견 — 남의 잘못을 보려 애쓰지 말고,
남이 행하고 행하지 않음을 따지지 말라.
불문 — 산 위의 바위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지혜로운 이는 비방과 칭찬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는다.
불어 — 나쁜 말은 하지 말라.
험한 말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온다.
문장을 천천히 읽다 보니, 화엄사에 오기 전의 내 마음이 떠올랐다.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얼마나 많은 말과 생각을 흘려보내며 살았던가. 언덕을 오르며 읽은 짧은 문장들이 발걸음보다 먼저 마음을 가볍게 했다.
사찰은 우리 세대에게 낯설지 않은 공간이다. 수학여행과 졸업여행, 산업견학이라는 이름의 단체 여행 속에서 전국의 유명 사찰을 수없이 다녔다. 경주 불국사, 오대산 낙산사, 화순 송광사, 양산 통도사, 하동 쌍계사와 천은사, 포항의 보경사, 서울의 조계사까지. 이름만 들어도 떠오르는 그곳들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다.
화엄사 역시 가을 단풍을 따라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럼에도 경내에 들어서면 자연스레 발걸음이 느려진다. 이곳이 스님들의 도량이라는 사실을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웅전을 둘러본 뒤, 나는 조용히 계곡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깊은 산중에서 들려오는 산새 소리와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나를 숲으로 이끌었다. 도시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오던 몸이,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가을 햇살 속으로 천천히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마저도 하나의 휴식처럼 다가왔다. 도시에서 쌓아 올린 생각들은 하나씩 느슨해졌다.
다리를 건너는 계곡 너머로 향숙 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말없이 앞서 걷는 그녀의 어깨 위로 나무 사이로 스며든 가을 햇살이 팔과 등을 차례로 건드렸다. 천천히 숨이 쉬어지고 굳어 있던 우리들의 어깨도 제자리를 찾는 느낌이 들었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조차 잠시 앉아 쉬어 가라는 신호처럼 들렸다.
늘 우리를 태우고 길을 찾아 나서던 향숙 씨. 이 순간만큼은 푸근하게 쉼을 하면 좋겠다. 계곡물소리 앞에서 모두가 같은 속도로 숨 쉬고 있듯이. 이 여행은 충분히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이렇게 마음이 맞는 글벗들과 함께한 여행은 종교와는 무관했다. 우리는 길을 따라 걷고, 부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각자의 속도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졌다. 화엄사는 그저 다녀온 곳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다시 바라보게 한 여행지로 진하게 남았다.
*사진; 노향숙, 안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