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새해를 맞은 기분에서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지난해를 찬찬히 돌아보다 생각나는 일이 있어 적어 보기로 했다. 나로서는 정말 새로운 일을 여러 가지로 접해 본 소감이라고나 할까?
한 해를 코로나 19 전염병에 이토록 두려워하며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생활을 언제가 될지 모르면서 뒤로 미룬 채 살아보기도 처음인 것 같다.
손녀의 육아가 끝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해 보려 했지만 면접을 보고 나도 더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는 돌아가고 내게 쉽게 오지는 않았다.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영업을 꾸리든지 하기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라 할 수 있는 아파트 분양사무실이나 부동산 텔레마케터(알고 보니 기획부동산) 일이었다. 장단점은 있었지만 내 성향에 그 둘은 맞지 않았고 서울로 올라오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막내딸과 의논 후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가 얘기하는 일은 준공무원급의 문화재 관리원이라는 일이었다. 친구는 부암동 창의문 근처에 살기 때문인지 창의문 안내소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 친하기도 하고 근무하는 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문화재 관리원이며 11개월씩 일을 하는 계약직에, 종로구청에서 매년 인력을 뽑는데 자격 요건이 소방안전관리자 2급 자격증이 있어야 하고 가능한 종로구에 거주해야 한다고 한다.
종로구엔 문화재가 많아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꼭 문화재에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니고 공원 관리며 도로변 화단 관리, 화장실 청소, 공영 주차장 주차원 등 하는 일은 매우 다양하고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소방안전관리자 2급 시험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접수를 하고 교육을 기다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원자가 많아서 접수를 하고 3주를 기다렸다가 교육을 받게 되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에 마치는 수업을 위해 캄캄한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해 영등포 당산동에 있는 소방 안전원으로 5일 동안 출퇴근을 했다.
소방 안전원 가는 길도 내겐 험난했다. 버스, 지하철을 두 번 환승하고 9분 정도 걸어야 했다. 바른말이지만 5일 동안 교유받고 시험 치고 자격증을 받는다고 얼마나 일을 잘할 수 있으랴만. 대학에서 학점이 모자라 교육 듣는 학생들도 있었고 100명 중 90% 이상이 아저씨와 연배 높은 어르신들이었다. 여자들은 10명도 채 되지 못했다.
하긴 창의문 안내소에서는 정년퇴직한 공무원이 근무한다는 얘기를 친구가 해주기도 했다. 일은 편하고 어렵지 않아 그 일에 많은 지원자가 있다고 했다. 2급 자격증이 있으면 시설관리 쪽으로 가서 일을 할 수 있어서 많은 아저씨들이 지원이 많았던 것이었는데 매월, 매주 교육에 시험에 엄청난 인원이 낙방하고 다시 재시험 비 내고 다시 시험 치는 돈과 교육생들이 교육비 내는 돈만 해도 엄청난 것에 난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도 나라에서 돈을 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나는 시험에 보기 좋게 떨어졌다.
이런 일은 일찍 알게 되어 그전에 시험을 준비했더라면 아마 붙었을지도 모르지만.
실습 평가와 필기시험을 치렀는데 실습은 통과되었으나 시험에서 불합격. 어려운 소방 용어와 설명들을 단 시간에 익혀 내 것으로 만들고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은 힘든 일이었다. 올해부터 커트라인도 10점 높아졌고 난도가 높다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2019년도까지는 60점이었다나. 강의 들어오신 교수님들이 말씀하셔도 몇 주전부터 교재를 구입해서 열심히 공부해온 나로서는 될 줄 알았다. 책 보며 공부하는 것은 자신 있었기에. 그러나 그것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해야 하는 것인가 보다. 친구도 당연히 합격이라고 생각했다. 체력 인증이 걱정이지 공부는 잘한다고 친구를 높이 샀다.ㅋㅋㅋ~
서울의 체력 인증센터는 여러 곳이 있었는데 내가 있는 곳에서는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마포 체력 인증센터가 그중 가까운 편이었다. 인증센터에 전화해서 미리 예약일을 할당받아야 하는 것도 첫 번째 할 일이었다.
우와! 모바일로 하든 컴퓨터로 하든 개인 인증받아야 하는 일은 어찌나 많고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 하다 개인 정보 입력을 수없이 하다가도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몇 번씩 하다가 인증센터로 산 넘고 물 건너가듯이 가서 체력 인증받을 날짜를 지정하고 확인받은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체력인증센터는 지하철과 버스를 환승을 거듭하며 찾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한 달 동안 열심히 걷고 윗몸일으키기 등을 연습해서 마포체력인증센터(체력 인증해주는 곳도 처음 알았다. 난 뭐지? 60 넘도록 살았는데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예약일에 가서 심사를 받았다. 소방안전관리자 재시험을 봐야 하기 때문에.
우리 나이 대에서는 다음과 같은 6개 항목을 통과해야 했다.
1. 교차 윗몸 말아 올리기
2. 달리기
3. 제자리멀리뛰기.
4. 상대 압력.
5. 왕복 오래 달리기,
6. 허리 굽히기.
6개 항목 중에 윗몸일으키기가 정말 어려웠다. 집에서 딸이 발을 잡아주면 10개도 했는데 팔을 교차해서 팔꿈치를 허벅지에 터치하며 하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체력센터 상담원이 인바디 측정표를 보면서 근육이 너무 없어서 힘들다며 달리기와 자전거 타기, 계단 오르기 등을 꾸준히 해야 한다며 조언을 했다. 윗몸일으키기는 허리를 다칠 수 있으니 반듯하게 누워서 두 다리를 90도 각도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헬스장에 나가서 체력을 기르라고 했다. 제자리 멀리 뛰기 연습을 할 때부터 무릎과 허리에 충격을 받고도 꼭 인증받아야 하니 다시 연습을 했다. 계단 오르기와 달리기, 자전거 타기, 다리 올리기를 했다.
무릎이 아픈 것을 참아가면서.
결국 무릎이 부어 올라 모든 운동은 중단했고 한의원에 다니며 며칠간 침을 맞았으며 물리치료를 받았다. 전자 뜸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그리고는 우연히 다른 곳에 겁도 없이 취직을 했다(겁도 없이 했다는 것은 격일제 일을 처음 해보기도 하거니와 감정 스트레스가 말도 못 하게 많은 일이었기 때문에). 소방안전관리자 재시험은 취소했고 체력인증받겠다는 예약도 취소해야 한다. 체력인증도 아무 때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제일 빠른 날짜가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 코로나 19가 심해져 체력인증센터가 당분간 운영이 안된다는 전화가 왔다. 문자 메시지와 함께 그것마저 취소하고 나는 시험에서 자유로워졌다.
실내에서 격일제로 일을 하는데 추운데 밖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고향 친구는 좋아했다.
일은 종로에 있는 규모가 좀 있는 체육 다중 시설이 있고 찜질방과 사우나가 있는 곳에 있는 매점의 일이었다.
그러나 6 개월쯤 지나자 코로나로 인해 거리두기가 시작되어 무급 휴가가 1주일이 2주일로 연장되기도 했고, 회원들은 불안해서 날짜를 연기시키며 발을 끊고 주변에 사업장이 있는 회원들만 나왔다. 하루 종일 마스크를 하며 근무를 해야 했고 사람들을 마주 대하는 일이다 보니 불안한 나날은 계속되어 갔다.
친한 고향 친구는 20년 동안 개인 사업을 하다가 살던 한옥을 리모델링을 해서 화가의 작품을 전시도 하는 갤러리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가끔 가서 바쁠 때 설거지를 도와주는 내게
"네가 라테만 만들 줄 알아도 맡겨 놓고 바깥 일도 보면 좋을 텐데" 하다가
. 마침 여름부터 사우나에 사직서를 내야겠다는 내게 처음 좋아해 주던 때와는 다르게 "그래, 나도 네가 거기 안 맞을 줄 알았어, 그만둬라, 언제 문 닫게 될지도 몰라 불안하다."며
마침 휴가가 연장되어 막내가 엄마를 꼭 모시고 가고 싶은 데가 있다며 인제 원대리에 있는 자작나무 숲에서 나무들을 감상하고 있는데
"너, 어디야? 생각해 봤는데 요즘 나라에서 바리스타 교육 무료로 가르쳐 준다는데 한 번 해보지 않을래? 그럼 우리 카페서 내가 쉬고 싶을 때 네가 해주면 되잖아"하며 전화로 긴 얘기를 했다
"막내랑 인제에 와 있는데 서울 가서 들릴게 그때 얘기하자."
아침에 출근해서 앞사람과 교대하고 24시간 일을 다음 날 아침 퇴근을 하고 집에 와 낮에 잠시 자던가 쉬던가 해야만 체력이 보충이 되었는데, 애들이 걱정하던 대로 오래 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내 몸이 견뎌내지 못하는 것을 인지하게 되어 사직서를 내고 새로 올 사람을 기다렸으니 한 달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왔다가는 24시간이 부담이라며 못하겠다고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젊은 사람들도 하기 힘든 것이라며 말리던 일을 해본 것은 소중한 경험이라 생각하며 바리스타 교육을 알아보러 다시 고용센터를 가서 국비지원을 받는 가능자로 확인받고, 바리스타 학원에서 상담을 했지만 바로 개강하는 것은 결원이 없어서 등록을 할 수가 없었다. 12월 중순에 개강하는 수업에 결원이 1~2명 생기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상담 멘토의 말을 듣고 대기 순번 2번째가 되어 기다렸다. 다행히도 쉬면서 치과 치료 마무리하고 부산에 다녀와야 하는 일정하고 딱 맞아떨어졌다. 100%로 국비는 아니며 30% 자부담이 있었지만 친구의 바람도 있었고 워낙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좋은 기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코로나가 재 확산되면서 개강일이 중순에서 말일경으로 연기가 되더니 다시 두 번째 연기가 되어 1월로 넘어갔다. 지하철로 학원을 오가야 하는 일이 겁도 나서 취소하고 돌아왔는데 그러면서 코로나가 심각해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없게 되었고, 친구의 카페는 개점휴업인 상태가 되었다. 개강이 연기되고 취소한 것을 모르는 친구는 커피 배우는 것보다 취업이 우선 아니냐는 말을 했다. 부담 갖지 말고 걱정도 말라하니
"그럼 뭐하고 살래?"
"책도 일고 글도 써야지?" 하며 웃으니
"맨날 돈도 안 되는 글은 써서 뭐하냐?"라고 핀잔을 주기 시작했다.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고 했을 때 첫마디가 "돈은 나와?"였다.
그래도 난 돈 많은 친구가 하나도 안 부럽고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어 행복감에 젖어 산다.
들락날락하는 감기로 인해 집콕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어도 조용히 브런치에 올라오는 작품들을 부지런히 읽으며 하트에 뿅뿅 색칠을 하는 즐거움도 누린다. 모든 글에 댓글을 달고 싶지만 말을 줄이기 위해 많이 참는다. 정말 정말 하고 싶은 말일 때만 간간이 댓글을 남기며 작가님들과 소통하는 재미에 빠져들고 싶은 나날이다.
그런 어려운 중에도 내겐 뜻깊은 한 해였는지도 모른다. 막내딸 덕에 다시 서울 생활을 하며 새로 글쓰기에 전념하기 시작한 일, 몇 해 전 부산에 내려가 자릴 잡고도 모교회를 나가지 못하고 교회와 멀어졌었는데 우연한 기회로 개척교회 나가게 된 일도 가장 소중하게 자리 잡는다.
Daum브런치를 알았어도 그곳에 내가 글을 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글 쓰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문학 블로그라는 이름을 달고 가끔씩 이것저것 글을 올리던 내게 막내는 용기를 북돋워 주며 브런치에 작가 응모를 해보라고 일일이 코치해줬다.
글은 어렵다, 완벽하게 써야 대중에게 발표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가득한데... 딸은 요즘은 크게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언제든 다시 고쳐서 올릴 수 있다며 우선 시작을 해야 글을 쓸 수 있지 않겠느냐고 차근차근 얘기해 줬다.
요즘은 무거운 글보다 재밌고 사이다 같은 글을 좋아하는 시대라는 얘기도 해주면서(그렇다고 무겁고 진지한 글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 그만큼 다양해졌다는 말이에요) 막내의 차근차근한 가르침으로 브런치 작가 응모를 하게 되었고 삼사일 되던 날 브런치 이모티콘이 반짝하고 떴다. 브런치 작가에 당선되었다는 메일을 받고 참 좋았다. 안도한 마음의 하나는 이제 게으름 피우지 않고 글을 쓰게 되겠구나였다. 뭔가 시작을 하면 끈기 있게 하는 성격인데 약간의 게으름으로 그동안은 글쓰기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일에 더 시간을 할애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