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에 분노하며

판단 중지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글의 전개에 대하여

by 반루이 Van Lou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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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 작가의 신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에 대해서 비판하기에 앞서 그동안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앞으로 지대넓얕이라 부르겠다) 시리즈를 읽은 소감을 간단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처음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집어 든 순간이 생각난다. 스스로 그 누구보다 관심사가 넓고 알고자 하는 열망 크다고 자부하던 나에게 이 책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철학부터 과학, 정치까지의 넓고 깊은 주제들을 다룬 이 책들의 탁월함과 작가분의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런 방대한 지식을 핵심만을 짚으면서도 깔끔하게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이 정말 멋지다고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 도서 주문을 하다가 우연찮게 본 기존 시리즈 이름 뒤에 숫자 '0'이 붙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시리즈가 새로 출간된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다시 한번 흥분했다. 정말 아무런 주저 없이 주문했다. 심지어 책이 어떤 내용인지도 제대로 몰랐다. 다만 이전 시리즈와 똑같은 이름의 다른 버전이 나온 것을 볼 때 분명 이번 책도 예전의 흐름을 잇는 훌륭한 책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렇게 책이 도착하고 읽기를 시작하여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또 한 번 책이 다루는 주제의 폭넓은 스케일과 작가님의 박식함에 대해서 놀랐다. 하지만 이번에 느낀 감정은 이전 2권의 책처럼 좋은 느낌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느낌을 보다는 불쾌했다. 기대했던 정도만큼 불쾌함은 더 컸다. 그 이유는 다음 2가지로 요약한다.



1. 과학적, 객관적 전개에 대한 약속은 어디로?

책은 우주의 시작에 대한 내용으로 들어선다. 그런데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 말하자면, 당연히 빅뱅이론이 이 챕터의 중심 내용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주의 시작에 대한 이론 중 빅뱅이론만큼 과학적으로 '풍성하게', '충분히' 검증된 이론은 없기 때문이다. 빅뱅이론은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다른 가설들이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이론의 바탕이 탄탄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자는 다중우주라는 '가설'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로 챕터의 포문을 연다. 그리고 그 내용이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며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과학적'인 빅뱅이론은 14페이지를 할애한 반면 작가 스스로도 인정한 '비과학적'인 가설에 대해서는 그에 4배가 해당되는 58페이지 분량을 쏟아붓는다. 글의 분량은 작가가 어떤 내용에 대해 핵심적으로 다루는 가에 대한 표시이다. 작가는 다중우주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후 말미에 이렇게 얘기한다. 사실 다중우주 이론은 근거도 없고 과학적이라 부를 수도 없다. 프롤로그에서 그는 우주에 대한 글을 통해 독자들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을 갖게 될 것이라 했다.



2. 특정 해석에 대한 히스테리적 태도, 판단 중립 원칙의 자기모순

책의 초반에 '준비운동' 파트에서 우리가 책의 여정을 떠나며 지녀야 할 2가지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첫 번째 세계를 구조화할 것. 둘째, 판단을 중지할 것. 여기서 두 번째 사항, 판단을 중지한다라는 뜻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다시 말하면 개인의 사사로운 의견이나 추측을 빼고, 사실이나 검증된 현상만을 우위에 두고 이야기하자라는 의미이다. (이 객관성에 의한 전개는 프롤로그에도 이미 약속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다음장을 읽으며 그 원칙이 깨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주론에 대하여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이상하리만치 '특정 해석'에 대한 히스테리가 느껴진다. 다중우주론에 대한 이야기 도중 빅뱅이론과 미세조정 우주와 같은 개념을 난데없이 언급되더니 기독교인들이 이 이론에 통해 스스로 안도한다라는 내용이 들어간다. (빅뱅이론에 대한 소개나 설명은 아직 시작도 안되었다.) 잠시만. 누군가 혹은 어떤 집단이 특정 이론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왜 작가는 꾸역꾸역 들먹이는 걸까. 우주의 시작에 대한 과학적 사실을 약속하셨고 또 그렇게 읽으려 하는데, 왜 나는 다중우주론이라는 전혀 과학적이지도 않은 가설에 대해 처음부터 이렇게 심도 있는 분량을 읽고 있고, 빅뱅이론이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 이론이라는 이야기를 왜 듣고 있어야 하는지? 진작에 설명되었어야 할 빅뱅이론은 아직 설명도 하지 않은 체 그 이론에 대한 특정 판단 방식을 은연중 계속 되풀이한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이젠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다중우주론이 그동안 풀지 못했던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구세주' 이론이라고 소개된다.(단락 하나의 제목이 '다중우주론 이 해결하는 문제'이다.) 관련 분야에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는다면 아마 '다중우주론이 곧 증명될 참 이론이지만 지금은 기독교계의 방해 수작으로 빅뱅이론이 한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라고 느끼기에 충분하다.


더군다나 기독교에 대한 히스테리는 이후 글에서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판단 중지 원칙이 책의 서두에 약속된 사실은 이쯤 돼서는 기억도 안 난다. 굳이 언급을 안 해도 될 여러 이야기가 객관적 사실을 풀어나가는 도중 주석처럼 꾸준히 등장하며 은연중 특정 판단잣대를 계속 독자에게 들이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빅뱅이론이 과학적인 이론이지만 이것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은 우연에 근거한 미신일 뿐이며, 오히려 과학적 근거가 없는 다중우주론은 우리가 앞으로 맞이할 구세주이다.


따라서 우주의 시작이라는 챕터의 모범적 내용 전개 방식은 이렇게 전개되었다면 어땠을까? 우주의 시작에 대한 내용을 물리학적으로 시작하려 한다면 빅뱅이론에 대해 소개하고 과학적인 부연설명이 필요에 따라 첨가된다. 그리고 그 외에 우주의 시작에 대한 다른 이론들 또한 소개된다. 그 후 각각의 이론을 이 책의 주제와 연관 지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책의 초반에 언급된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깔끔한 구성이다.





정리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책은 내용 전개에 앞서 판단 중지의 원칙을 우리가 앞으로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주의 시작에 있어서는 '독자들에게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을 갖도록 돕겠다'라고 한다. 하지만 글의 분량이나 배치 그리고 글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를 종합하여 생각해 볼 때, 특정 비과학적인 우주론에 대한 맹신을 과학적 사실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또한 빅뱅이론 이면의 해석에 관련하여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을 책의 전반에 걸쳐 고집스럽게 어필하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 진실을 탐구하려는 독자들의 여정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 작가의 팬으로서 자기모순적이고 편협한 색채가 짙은 이번 저작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이유이다.


작가분께서 색안경을 벗을 용기를 내시기를 간절히 응원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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