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에는 꽃이요, 음지에는 눈이라

지리산 도솔암

by 하로동선


아침 햇살이 퍼지는 산길을 힘겹게 오릅니다.

앞선 이의 등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내 숨길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헉헉거립니다.

지리산 깊은 골 도솔암 가는 길은 힘겹습니다.

산죽은 발길을 잡고, 가시나무는 옷깃을 당깁니다.

능선에 올라 잠시 숨을 돌리니 힘겨움은 금세 잊히고,

이제 온순한 길이 나를 기다릴 거라는 턱없는 낙관에 마음이 즐겁습니다.

망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이자 원죄라고 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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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암의 아침은 고요합니다.

산 아래 선방에서는 동안거, 하안거 두 철만 결제를 하는데,

수미산 아래 도솔천은 일 년 내내 결제를 하는지, 암자 입구에는 결제 중이라는 나무팻말이 걸려 있습니다.

산새처럼 부지런히 날아든 철없는 산객들의 기척에, 좌선삼매에 들었던 스님이 문을 열고 나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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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암은 곧 도솔천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欲界) 6천(天) 중 제4천(天)인 도솔천은

‘만족하다’라는 의미로 설명되어, 지족(知足), 묘족(妙足)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만족함을 안다는 뜻이니,

극락이란 결국 내 분수를 알고 가진 것에 만족하는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모든 것이 준비된 풍족한 공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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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의 모습이 이럴까요?

고요하고 차분하며 따뜻합니다.

'양지에는 꽃이요 음지에는 눈'이라고 했던 인오선사의 시구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도솔암은 청매 인오선사가 공부한 곳입니다.

선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스승을 따라 3년간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불가에서는 선시 제일봉(禪詩 第一峰)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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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서 마천으로 들어오려면 오도재를 넘어야 합니다.

선사께서 도솔암에 계실 때,

마천을 거쳐 고개 너머 함양장터까지 150여 리 길을,

장작 지게를 지고 하루 해거름에 왕래하셨는데,

어느 날 고개 마루를 넘어서 걷다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그 고개를 ‘오도재(悟道峙)’로 부르게 되었으니,

그런 인연 때문에 지금 오도재 정상에는 선사의 선시(禪詩)가 돌에 새겨져 서 있습니다.

옮겨보겠습니다.



십이각시(十二覺時) 靑梅禪師

覺非覺非覺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覺無覺覺覺 깨달음 자체가 깨달음 없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覺覺非覺覺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豈獨名眞覺 어찌 홀로 참깨달음이라 이름하리오



도솔암 가는 길은 안내판도 없고, 길도 뚜렷하지 않습니다.

다만, 눈 맑은 스님과 꾀 많은 산꾼들만 드나드는 한적한 곳입니다.

행여 인연이 되어 가시거든 햅쌀 두어되 챙겨서 가시는 게 제일 큰 보시입니다.

깊은 산중이라 사람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지고 올라야 하기에

속세에 흔한 돈이, 도리어 짐이 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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