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향나무를 아시나요?

미스김 라일락

by 하로동선



하동 음정마을에서 오리정 계곡을 따라 벽소령 대피소로 오르다 보면, 어디선가 꽃향기가 난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면 초록 수풀 사이로 연보라 꽃다지를 찾을 수 있다. 지리산 정향나무다.

정향나무(Syringa patula)는 한국과 중국 북부에 자생하는 물푸레나무과의 관목이다. 키는 2~4미터. 5월이면 연보라 꽃을 피우고, 그 향은 향신료 정향(丁香, clove)과 닮았다 해서 이름이 붙었다. 사람들이 라일락이라 착각하지만, 라일락은 유럽 원산의 Syringa vulgaris이고, 지리산 능선에서 자라는 것은 한국 자생종 정향나무다. 둘은 같은 속(屬)이지만 다른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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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미군정 시절의 서울. 미국 농무부 소속 식물학자 엘윈 미더(Elwin Meader)가 북한산에서 정향나무 종자를 채집해 미국으로 가져갔다. 전쟁 직전의 한반도에서 씨앗 몇 알이 태평양을 건넌 것이다.

미더는 그 종자를 뉴햄프셔 대학교로 가져가 육종을 시작했고, 7년 뒤인 1954년, 작고 조밀하며 향이 더욱 진한 새 품종이 상업용으로 등록되었다.

그는 새 품종에 서울 근무 당시 연구실 비서의 이름을 빌려 '미스킴 라일락(Miss Kim Lilac)'이라 불렀다.

이후 미스킴 라일락은 북미와 유럽의 정원수 시장에서 라일락 중 가장 많이 팔리는 품종이 되었다. 원종인 정향나무보다 수형이 작아 도심 정원에 적합하고, 내한성이 강하며, 향기가 진하다. 미국 원예 시장에서 미스킴 라일락이 차지하는 자리는 지금도 확고하다.


정향나무와 라일락을 구분해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꽃만 보고 '어, 라일락이 지리산에도 있네'라고 말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스킴 라일락의 어미나무는 이 땅의 산에서 여전히 5월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중산리에서 장터목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법천폭포에 못미친 곳에, 정향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어느 해 공단에서 등산로를 정비한다고 모두 잘라내고 말았다. 지리산 구석구석에 무더기로 핀 정향나무는 많지만, 대부분 길이 막혀 갈 수 없다. 그래서 이제는 하동 음정마을에서 벽소령 대피소로 오르는 길이 정향나무를 만나는 가장 쉬운 길이 되었다.


혹시 5월에 지리산에 가시거든 정향나무 그늘 아래 배낭을 내리고, 그 향기로 몸을 채우는 호사를 누리시길.



눈물은 봄꽃보다 깊어 푸른 강물이 되고

강에는 수천의 풀벌레가

내 울음을 대신 울며 떠나갔지요

흐느끼는 나의 피도 물결따라 그냥 떠나갔지요.


때는 철없는 봄,

정향(丁香)나무 푸른 그늘 밑이었지요.


- 박정만. 외로운 풀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