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골짜기에는 지금

늙은 산꾼의 소원

by 하로동선


산길은 참 아름답다. 계곡을 따라 살방살방 걷다가, 물길이 끝나면 유순한 사면을 부드럽게 돌아 능선에 올라서는 산길.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고 절로 즐거워진다.

산길을 걷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 길은 누가 맨 처음 걸었을까. 아마 처음에는 산짐승들이 걸었을 것이다. 그 흔적을 따라 약초를 찾고 나무를 하러 온 사람들이 하나 둘 걷다 보니 길은 더 뚜렷해지고, 누구나 걷는 길이 되었으리라.

산길을 걸어보면, 길이 결코 힘들거나 위험한 곳을 일부러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혹시 길이 험하고 힘들다면, 그 구간에서 가장 수월하고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일부러 죽을 짓은 하지는 않으니, 다만 그렇게 가는 것이 최선이라서 그곳으로 길을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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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수 천 수 백 년 산짐승이 걷고 사람들이 드나든 흔적이며, 산의 핏줄이다. 지리산은 깊고 넓지만, 온 산 계곡, 능선에 길이 없는 곳은 없다. 그러나 산의 핏줄 같은 길이, 현재는 일부분만 '지정 탐방로'로 개방되어 있고, 대부분은 '비법정 탐방로'로 막혀있다. 처음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며 공식적인 탐방로로 개방되었던 구간들도, 이제는 이런저런 이유로 '출입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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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비법정 탐방로'로 지정되면 그 길이 다시 개방되기는 힘들다. 그런 사례가 거의 없다. 수백 년 간 사람들이 걷던 길이, 지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막히는 것이다. 비법정 탐방로 지정에 어떤 근거와 생태 조사 자료가 활용되었는지, 외부에 투명하게 공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떤 동물이나 식물이, 어느 구간에서, 어느 수준의 영향을 받는지를 사람들이 확인하기는 어렵다. 자연공원법 제1조의 '자연 생태계와 자연경관의 보전 및 지속 가능한 이용' 중에서 '자연 생태계와 자연경관의 보전'만이 '출입금지'의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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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막는다고 사람들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주민들은 생계를 위하여 오르고, 산꾼들은 원래 길이 있었으니 간다. 단속은 하지만 운 나쁘게 걸린 사람만 과태료를 낸다. 이 방식이 지리산 보호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통계나 결과는 공개되지 않는다. 그리고 개방된 탐방로에만 사람들이 몰리니 산길은 넓어지고 동물들은 고립된다. 반대로 비법정 탐방로 구간은 관리가 안되어 허물어지고 묵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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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선계곡은 함양군 마천면을 비롯한 인근 주민들이, 조상 대대로 천왕봉으로 향하던 가장 오래된 길이다. 하지만, 1998년부터 생태계 보호와 안전사고 예방이라는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었다. 그런데, 그 후 계곡 인근에는 임도가 개설되었고 공단이 설치한 시설물은 더 많아졌다. 분명 폐쇄된 탐방로이지만, 주민들은 암묵적으로 계곡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등산객의 접근만 막는다. 이런 불합리한 정책에 대한 말들이 많아지자 최근 일부 구간에 한해 예약제 탐방이 허용되었지만, 하루 입장 인원은 소수로 제한된다. 이것을 개방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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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나빠도 탐방로는 막힌다. 기상청 특보 발효가 기준이다. 산 위와 산 아래의 날씨가 달라도 산 전체를 통제한다. 초속 몇 미터의 바람이 어느 구간을 위험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구간별 기준이나 안내는 없다. 다만, 폭우, 폭설, 강풍 등 기상청의 광역 특보가 '전가의 보도'다. 통제 결정은 대부분 전날 저녁이나 당일 새벽에 내려진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탐방객은 입구에서 되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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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나 유럽의 국립공원은 위험 정보를 충분히 알리고, 최종 판단과 책임은 탐방객 개인의 결정에 맡긴다. 특히 사고가 나면 그 책임은 모두 본인에게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위험한 구간은 보험 가입도 필수다. 경험이 많은 등반가와 저지대 산책객을 구분하여 자연을 즐기는 방법을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법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사고가 발생하면 관리 주체에게 책임을 묻는다. 국가와 공권력이 언제까지 국민 개개인의 판단을 대신하겠다는 건지 참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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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공원법 제1조는 자연 생태계와 자연경관의 보전 및 지속 가능한 이용을 동시에 목적으로 명시한다. 두 가지의 목적이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정책이 절실하다. 자연경관 보호라는 핑계로 관리의 편의성만을 추구할게 아니라, 지리산을 가장 지리산 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길은 이어져야 하고, 늙은 산꾼은 그 길을 다시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