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미학
산에 오래 다니다 보면 장비가 점점 많아진다. 그러나 늘 챙기는 장비는 몇 가지 안 된다. 취사도구와 안전 장비, 그리고 응급의약품 정도다. 그 외의 장비는 그날의 산행 장소나 날씨에 따라 달라진다. 여름엔 비옷이 필수고 겨울엔 고어텍스 자켓이 꼭 필요하다. 가벼운 워킹이나 암벽등반처럼 사람마다 추구하는 산행 스타일이 달라도 기본 장비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산을 오래 다니다 보면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장비가 생기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배낭을 수 십 개 사들이고 어떤 사람은 버너를 종류별로 모은다. 나도 산에 오래 다니다 보니 장비가 제법 많다.
가끔 내 장비에 눈독 들이는 사람이 있으면 나누어 주기도 하고 손이 잘 가지 않는 장비는 중고로 팔기도 한다. 10년 전부터 장비를 단출하게 하려고 많이 줄였다. 그래도 배낭은 10여 개가 넘고 코펠이나 버너는 베란다에 차고 넘친다. 사계절 옷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렇게 장비가 많아도 내가 가장 아끼는 장비는 타프다. 그것도 특정 브랜드의 타프를 가장 아낀다. 일 년 내내 배낭에 넣어 다닌다. 비싼 장비도 아니고 그렇다고 귀한 장비도 아니다. 다만 타프를 치고 그 아래에 머무는 걸 좋아한다. 일종의 癖 수준이다.
인류가 동굴을 벗어나 처음으로 비를 피했던 방식은, 아마 거창한 집이 아니라 커다란 잎사귀나 나뭇가지 아래였을 것이다. 타프는 그 원초적인 형태를 가장 순수하게 계승한 장비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일까, 타프 아래에서의 하룻밤은 텐트보다 훨씬 더 야생에 가깝다.
타프를 좋아하는 이유는 많다. 우선, 타프의 개방감을 좋아한다. 타프와 가장 비교되는 장비가 텐트인데, 둘은 상호 보완적인 면과 대립되는 면이 공존한다. 비교하자면, 텐트가 '방'이라면, 타프는 '거실'이다. 텐트가 비바람을 차단시켜 아늑한 공간을 제공하는 반면, 타프는 바바람에서 완벽하게 보호해 주지는 않지만 대신 산을 향해 열린 해방감을 준다.
그리고 타프의 간편함을 좋아한다. 텐트와 달리 타프는 지형을 따지지 않고 어디나 설치 가능하다. 주위에 나무 몇 그루가 있다면 더없이 금상첨화지만, 나무가 없어도 등산 폴 몇 개만 세우면 바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눈 비를 막아준다. 그러면서도 시야는 열려 풍경과 바람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비용과 효율성을 따져봐도 타프는 압도적이다. 산꾼에게 배낭의 무게는 곧 고통의 총량이다. 그런데, 타프는 고작 300그램 내외에 가격은 20만 원 정도다. 비슷한 가격대의 경량 텐트가 1킬로그램을 훌쩍 넘기면서도 가격은 100만 원이 우스운 것을 감안하면, 타프는 가성비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타프는 그냥 직사각형으로 잘라서 재단한 방수천에, 모서리와 중간에 슬링을 달아 놓은 거라, 설치가 간단해 보인다. 그런데 막상 타프를 설치해 보면 그리 쉽지가 않다. 경사가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바람은 어느 골짜기에서 불어오는지, 나무의 간격과 수형은 어떠한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비가 들이칠 것 같으면 한쪽 끝을 낮게 내리고, 바람이 시원한 날엔 매듭을 높여 개방감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프 설치의 핵심은 슬링의 텐션이다. 적게는 4개, 많게는 12개의 슬링이 모두 같은 장력으로 버텨야 제대로 기능한다. 그렇지 않으면 약한 부분이 바람에 풀어지거나, 빗물이 쏟아져 내리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고정된 방법이 없기에 타프는 사용자의 숙련도와 창의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감히 말하건대, 타프를 치는 행위는 고도의 지적 유희이자 지형과의 대화다.
그런데, 이 모든 구구절절한 사연은 다 핑계일 뿐이고,
내가 타프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비 오는 날,
타프 아래 앉아 친구와 나누는 술 한 잔 때문이다.
타프를 때리는 빗소리와
슬링을 흔드는 바람 소리는
힘들게 산에 오른 자 만이 즐길 수 있는
세상 최고의 안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