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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waysAwake Mar 12. 2017

전단지를 돌리는 할머니

# 일상을 바라보는 사소한 재해석

"고마워요."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자 입김이 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옆에서 같이 길을 걷던 과장님은 "착한데, 먼저 손도 내밀고"라고 말했다. 나는 할머니가 준 전단지를 잠깐 훑고 주머니에 접어 푹- 찔러 넣었다.

역삼역 지하철 출구 앞은 거대한 빌딩들 탓에 기류가 부딪쳐 갈라지며 찬바람이 인정사정없이 분다.




밥벌이는 서글픈 일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돈이 없어 파도처럼 반복되는 가족들 끼니 걱정을 했던 젊은 날의 아버지 모습은 아직 뇌리에 선하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일하며 스스로 밥벌이를 한다. 지겹고도 견뎌내야 할 것이 많은 밥벌이는 우리 모두가 해나가야 할 필연이다. 나는 이런 인생의 굴레가 가끔 한없이 슬픈 것이다. 늙어버린 나의 아버지 사진을 바라보며 느끼는 말 못 할 감정이 이와 유사하다.


세상은 더욱 가파른 속도로 돈을 치켜세우며 물질만능주의를 부추긴다. 그 증거로 돈이 최고다, 라는 명제가 진리가 되고, 매주 로또방엔 사람들로 북적인다. 돈보다 좋은 것은 더 많은 돈이다, 라는 가사도 있다.


밥벌이도 자신이 생각하는 적합한 보상이 주어진다면 충분히 견뎌낼 만한 일이다. 내가 이 정도까지 받는 게 맞는 건가?라고 반문하는 직장인에게 일에 대한 불만은 없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이 돈을 받으려고 이렇게 아등바등 건가,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직장은 그 자체로 불만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적합한 보상의 기준을 무엇일까, 그건 정량화하기 힘들다. 동일한 일을 했을 때, 개인이 요구하는 보수는 개인마다 다르고 회사에 따라 줄 수 있는 보수도 천차만별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은 돈을 받고 일하게 하여 불만을 최소화한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다. 그건 모든 경제적 질서를 붕괴하는 공산주의의 시작이다. 이런 상황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저시급을 지정해 최소한의 보수라도 인정해 노동 착취를 막는 것이다.  



올해 최저 시급은 전년 대비 7.3% 오른 6470원이다. 한 시간 일하면 일반 음식점에서 밥 한 끼 해결할 수 있는 보수다. 이 보수의 적정성은 차지하고 나는 다시 전단지 할머니 얘기로 돌아간다.


언젠가 뉴스 기사에서 전단지를 돌리는 할머니들이 최저시급을 보장받기는커녕 돈을 떼이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을 보았다. 명백한 노동 착취 앞에 당신을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할머니들은 그렇게 소외된다. 저항하는 할머니가 잘리고 대체자가 투입된다. 할머니들이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일은 제한돼있기에 지원자가 많다고 한다. 또 할머니들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점심시간에 전단지를 돌리기 위해 끼니를 제때 챙겨 먹지 못할 때도 많다고 한다.


나는 할머니들이 어디서, 어떤 메뉴의 밥을 먹을까라고 생각해봤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친할머니는 78세의 연세로 별세하셨다. 나를 무척이나 아끼던 할머니는 매일 무릎 쑤신다고 약을 드시고, 파스를 바르고 하셨다. 나의 손에는 어렸을 적 할머니 무릎을 주물러 드리며 느꼈던 앙상한 뼈의 감촉이 여전히 남아있다. 전단지를 돌리시는 할머니들의 연세는 삭신이 쑤시다던 나의 친할머니 연세와 비슷해 보인다.




우리는 무엇이 그리도 바쁘고 복잡하고 빠듯하기에 전단지를 내미는 그 어려움을 뿌리치는 걸까,


강남역, 역삼역, 종각역, 홍대역, 사당역, 서울역. 우리가 떠올리는 그 역에 대한 단상에 한 번쯤은 누군가의 밥벌이의 고달픔을 위로하는 인간적인 사색이 필요하다. 할머니들에겐 법적인 장치 보완도 필요하지만, 무심히 지나치는 우리에 대한 사소한 반성이 우선이다. 우리는 지하철 역에서 나와 곧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건물 밖의 상황을 잊어버리지만.


도시의 겨울과 여름은 언제나 오랫동안 밖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가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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