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마이 프렌드

스치면 인연, 스며들면 사랑이다ᆢ

by 주안

낚시터 입구로 들어서는 좁다란 오솔길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웬 백발의 여성이 한 손에 꽃을 들고 오다가 내 차를 보자 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비켜섰다.

길이 좁아 혹여나 다칠까 싶어 나는 천천히 차를 세웠다.

그녀를 먼저 지나가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시간을 주고 잠시 기다렸다. 마침 창문이 열려 있었기에 운전석 옆을 스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작게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 했다.

평화로이 산책 즐기는 시간에 나의 등장으로 불편을 준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가을 햇살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과 가슴으로 바짝 당겨 안은 노란

꽃다발이 보기 좋아서였는지 모른다.

푸르고 커다란 데님 소재의 앞치마를 두른 그녀는 언뜻 보아 예순은 족히 넘어 보였지만 단아하고 품위

있었다. 낯선 이의 배려가 고마웠는지 환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나에게 말을 건넸다.


" 낚시 하러 오셨나요? 우리 집은 바로 저 위쪽인데 괜찮다면 꼭 들러서 차 한잔 하고 가세요."


갑작스러운 호의에 순간 당황 되었지만 이내 감사하다며 간단히 목례 하고 낚시터로 향했다.

평일임에도 낚시터에는 웬일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일부러 한적한 시간에 찾아왔는데 어디선가 단체로 출조(出釣)를 왔는지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메아리를 쳤다.

규모는 작지만 집에서 멀지 않은 데다 산 안쪽에 자리하고 있어 조용히 망중한을 즐기기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한쪽 구석에선 대낮임에도 술자리가 벌어진걸 보니 아무래도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몇 군데 포인트를 둘러보았지만 이미 먼저 온 분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나마 빈자리들은

여자인 나에게는 불편한 위치여서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며칠 전부터 벼르고 나선 길이었는데 하필 이런 날에 낚시터를 찾은 나의 운 없음을 자책하며 다시 차에 올랐다. 조금 전 지나왔던 그 오솔길로 차가 진입하고 50미터쯤 올라갔을 때였다.

길 왼편으로 하얗고 아담한 집 마당에 앉아있는 그녀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화분에 흙을 넣다가 내 차를 보자 장갑을 낀 손을 번쩍 들어 반가운 듯 흔들었다.

그러더니 큰 소리로


"이리 와 요. 바쁘지 않으면 쉬었다 가요." 하며 불러 세운다.


잠깐 망설였지만 두 번이나 초대 받았는데 거절 하기도 미안해서 차를 멈췄다.

어차피 낚시할 시간을 넉넉히 빼두었던 참이니 급할 것도 없었다.

나를 향해 바삐 걸어온 그녀는 자기네 마당은 작아서 주차가 어렵다며 옆 집에 세우라고 알려주었다.

친하게 지내는 이웃인데 한 달에 한번 정도만 와서 아무도 없다며 언제든 사용하도록 허락을 받아뒀으니

괜찮다고 했다.

잠시 후 차에서 내린 나를 자기 집 마당으로 안내하며 그녀는 약간 흥분한 듯 말했다.


"여기 앉아요. 그리고 저쪽을 좀 보고 있어요. 금방 차를 끓여 올 테니..."


하며 총총히 현관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마당은 소박하고 정갈했다.

드문드문 싱그러운 화초와 예쁜 꽃들이 심어진 작은 토분과 도자기로 만들어진 조각품들이 놓여 있었고,

벽 한 면에는 주제를 알 수 없는 모호한 그림도 두어 점 무심히 기대져 있었다.

모든 것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어우러져 보기 좋았다.

나는 파란색 페인트가 칠해진 나무 의자로 다가가 조심스레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알려 준 대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는데 순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하고 말았다.

낚시터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고 쏟아지는 햇살을 잔뜩 머금은 수면은 마치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주변을 에워싼 나무들이 바람에 춤을 추며 사방에서 바스락 소리를 냈고 얼굴을 스치는 공기는 마냥 따뜻했다. 조금 전 다녀온 낚시터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지만 무성영화 한 장면처럼 영상만 있고 아무런 소음을 내지 않았다. 너무 아늑해서, 너무 고즈넉해서.. 덜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얼마만의 평온인가.

3년에 걸친 시부모님 간병으로 나는 지쳐있었다.

오랜 지병으로 투병 중이던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6개월이 지나갈 무렵, 이번엔 시어머님이 말기암 판정을 받았다. 수술과 항암치료로 입퇴원을 반복했고, 고열과 약 부작용으로 응급실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부모님이 아프시니 자식으로 당연한 도리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의 마음엔 점점 그늘이 들었다.

좀 쉬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장소에서 잠시라도 내 고단함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 바람을 이루게 된 것이다.


"메리골드 차예요. 좋아할지 모르겠네요. 향이 아주 좋아요."


넋을 잃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나에게 그녀가 다가와 조용히 찻잔을 건넸다.

그녀의 눈빛과 몸짓은 다정하고 온화했다.

마치 내 속을 다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를 건네 준 후 그녀는 조용히 내 옆에 앉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갈색 빛이 연하게 감도는 메리골드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입안에서 은은한 꽃향기가 퍼졌다.

몸까지 따뜻해지며 가슴속 어딘가의 허기 같은 것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참 이상했다.

오늘 처음 만난 타인의 뜨락에서 나는 강렬하게 위로받고 있었다. 서로를 알지 못했고, 그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오롯이 그 순간에 빠져들면서 깊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이 지나고 , 먼저 입을 뗀 건 나였다.

근래 힘든 일들이 있었고 그래서 나 자신에게 잠깐이라도 휴식을 주러 나선 길이라는 것과

낚시터의 예상치 못한 상황까지.

그녀는 낯선 이의 수다를 미소 띤 얼굴로 말없이 들어주었다. 우리는 메리골드 차를 몇 번 더 우려내 나눠 마시고는 그제야 어색하게 통성명을 했다.

그녀의 집은 서울이었고, 이곳은 고향 집인데 금요일마다 내려 온다는 것, 퇴직하여 세계 여행을 꿈꾸며 준비 중이었으나 손주를 봐달라는 아들 내외의 간곡한 청을 거절 못하고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언제나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가 되는 것이고 그 힘겨루기의 대상이 자식이라면 세상의 모든 엄마는 백전백패다.

서른 살에 남편과 사별하여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겪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더니 밝고 우아해 보이기만 했던 그녀의 삶도 예외는 아니었다.


"메리골드의 꽃말이 뭔 줄 알아요?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에요. 그래서 좋아하죠. "


그녀가 웃는다.

나보다 몇 곱절은 더 힘들었을 시간을 지나왔고, 수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았을 그녀.

여자의 삶보다는 엄마로만 살았을 그녀가 소녀처럼 웃고 있다.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장소에서 그녀를 따라 웃다 보니 슬며시 나의 엄살이 부끄러워졌다.

많이 아파 본 사람은 다른 이의 상처도 어루만질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감사했다는 인사를 하며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는 자신을 친구로 생각해 달라며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했다. 주중에는 손주를 봐주느라 이곳에 없지만 주말에는 혼자 지내니 부담 없이 오라고 몇 번이고 말해 주었다.

돌아가는 나의 손을 꼭 잡아주던 그녀를 보며, 나는 나이를 넘어 그녀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넓게 열려있는 마음으로 기꺼이 발을 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은 보자기 같은 사람이다.

보자기는 물체의 모양이나 크기에 상관없이 어떤 물건이든 감싸줄 수 있다.

뭉툭하든 뾰족하든 주어진 물건을 타박하지 않고 자신의 형태를 기꺼이 바꿔주는 유연한 태도를 가졌다.

사람을 품는 일도 똑같다.

어느 한쪽이 단단한 내력(耐力)을 가지고 곁을 내주면 인연은 시작된다.

그런 사람에겐 겹겹이 싸매었던 나의 연약한 속살을 들켜도 되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서로의 민낯을 드러내며 다가서고, 천천히 스며들다 보면 우정도 싹트고 사랑도 빚는 것이다.


차가운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오는 주말엔 메리골드 차를 들고 따스한 나의 친구에게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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