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 Oct 10. 2020

아빠 기억하기 : 동질감

#5

*소뇌위축증을 앓고 있는 아빠를 시간이 지나서도 기억하기 위한 기록


동질감

이 곳,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온전히 내 감정을 털어놓고 싶어서였다.

아빠의 병에 기인한 내 우울을 털어놓고 싶어서였고 나조차 감당이 안되게 부유하는 수많은 생각을 가감 없이 쏟아낼 곳이 필요했다.


그런데 가끔 내 글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어떤 검색어를 치고, 어떤 경로로 이 작은 나만의 공간까지 오게 되었는지 본다.

이런 기능이 있는 줄도 몰랐다가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검색어를 보고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검색어는 다양했다.


'소뇌위축증'

'소뇌위축증 증상'

'소뇌위축증 치료'

'소뇌위축증에 좋은 음식'

'소뇌위축증 어지럼증'

'소뇌위축증 배뇨'

...


데자뷰가 일어나는 듯했다.

저 검색어를 입력하고 간절하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찾아다녔을,

소뇌위축증을 앓고 있을 본인과 그들 가족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도, 우리 가족도 그랬으니까.

정보도 많이 없는 이 고약한 병에 대해 수없이 검색하고 작은 희망이라도 쫓아다녔으니까.

그리고 그들에게 내 글이 상처가 될 것만 같아서 위축됐다. 기적은 없다고 못 박아버린 것 같아서.


동시에 짙은 동질감이 전해졌다.

온몸의 근육을 하나하나 마비시켜버리고, 끝내 보는 것도 걷는 것도 먹는 것도 화장실에 가는 것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것 어느 하나도 남겨주지 않는 이 무자비한 병이 주는 깊은 박탈감은 정말 겪고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환우회

3~4년 전 어느 날 엄마가 이야기했다.

…"소뇌위축증 환우회가 있더라."

우리는 바로 카페에 가입했고, 대구 소뇌위축증 환우회 회장분이 바로 전화가 오셨다.

엄마는 통화를 하며 또 눈물을 쏟았고(우리 가족은 눈물이 많아졌다) 대구에서 일주일에 한 번, 소뇌위축증 환우 분들이 모여 트레이너와 함께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는 그다음 주에 바로 아빠를 데리고 장소로 향했다.


일찍 도착한 우리는 환우회 회장 분과 먼저 인사를 나눴다.

회장 분도 소뇌위축증을 앓고 계신 분이셨다. 엄마와 나는 아빠의 병을 언제 알게 되었는지, 요즘 어떤 증상을 보이고 있는지 이야기를 하다 또 눈물이 터졌다.

"아직도 눈물을 흘리시는구나~"

"처음 오시면 다들 이야기하다 많이 우시는데, 점점 괜찮아지세요" 회장분은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분 말씀은 틀렸다. 우리 가족은 아직도 수도꼭지다. '아빠'는 우리의 눈물 버튼이다.


그곳에 모인 환우회원 분들의 모습은 아빠와 비슷하다.

아빠와 같이 거동을 잘하지 못하고, 종종 넘어지시는 분들도 계시며 어눌한 말투를 쓰신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조금은 지치고 슬퍼 보이는 보호자가 그들을 지탱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병에 걸리지 않아 보이는 분들도 계시다. 말씀도 잘하시고, 식사도 잘하신다.

아빠는 당시 초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모인 분들 중에서도 증상이 심한 편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아빠 증상의 정도를 다른 분들과 비교하고 또 낙담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다양했다.


"여기 평생 살았는데 병 때문에 서울로 이사를 가 치료를 받으려고 한다"

"이제 곧 딸이 결혼하는데 내가 거동도 잘 못하고 어눌해서 상대 가족이 싫어할까 걱정이다."

"퇴직하고 이제 남은 인생 즐기려니, 병에 걸려버렸다"


동질감이 들었다.


3년 전 처음 환우회를 찾고, 우리는 자주 운동을 나가진 못했지만 엄마와 다른 보호자분들은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았다. '같은 처지'라는 동질감이 주는 위안은 생각보다 컸다.



천년집과 후회

아빠를 포함한 환우회분들은 당시보다 증세가 다들 심해졌다.

아주 멀쩡해 병에 걸린 것 같아 보이지 않던 분들조차.


그리고 얼마 전 그중 한 분이 고인이 되셨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배우자 분은 환우회 단톡방에 글을 남기셨다.


그이가 천년집으로 떠났다고.

힘들었지만 같이 데리고 운동 다니던 때가 좋았다고.

휠체어로라도 여행을 많이 다니라고.

사랑한다는 말도 많이 못 해봤다고.

온통 미안한 것뿐이라고.

다들 사랑한다고 많이 말해주라고.


엄마와 나는 그분의 메시지를 보고 또 눈물을 쏟았다.

담담한 글에 담긴 후회와 슬픔이 가슴을 쳤다. 그 누구의 죽음보다도 슬픔이 진하게 와 닿았다.




나는 아빠가 처음 병에 걸린 5년 전에도 절망했고, 지금도 절망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5년 전 나는 너무나 행복한 사람이었다.

아빠가 걸을 수 있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아빠가 그 정도로만 아프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그때의 나에게 말할 수 있다면, 지금 더 사랑하고, 더 많이 이야기하고, 그 속에서 더 행복하기만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마 한 1~2년 뒤의 나는 또 생각할 거다. 아빠가 1~2년 전 그때 그 정도로만 아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리고 혹시나 내 글을 잃고 있을 소뇌위축증 가족을 두신 분들께 말하고 싶다.

만약 사랑하는 가족 때문에 절망하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앞으로 남은 시간 중 그가 가장 덜 아픈 때라고.

지금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사랑하자고.


이건 나와 동질감을 느끼고 있을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나에게 되뇌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가의 이전글 아빠 기억하기 : 보통의 마지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