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국수와 짜장 국수

초등학교 방학일기 4편

by 디제이쿠

할머니 댁에서의 여름 방학은 매일 똑같은 걸 해도 지루하지 않았다. 특히 밥이 그랬다. 아침에 일어나면 할머니가 차려 놓고 나간 아침을 먹는데, 계란찜과 김이 밥상에 빠지지 않았다. 아마 어린이를 위한 맞춤 메뉴였을 테다.


12시가 되면 시내에 나갔던 할아버지를 눈 빠지게 기다리는데, 손녀들 주려고 항상 뭐라도 사 오셨다. 치킨이든 아이스크림이든 과자든.

(그래서인지 아빠도 엄마도 형제들도 밖에 나갔다 오면 빈손으로 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그 기분이 참 좋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


할머니는 요리 솜씨가 좋으셨다. 여름 저녁의 단골 메뉴는 콩국수와 호박전이었는데, 믹서기에 콩을 갈고, 호박 속을 긁어내는 저녁이 나는 참 좋았다. 콩물, 오이, 호박, 이 모든 것에서 여름 냄새가 났다고 할까.


또 어떤 날은 할아버지가 애들 짜장면 해주라고 짜장 소스와 국수를 사 오기도 하셨는데, 할머니가 국수를 삶는 동안 할아버지와 마루에 앉아 구름이 잔뜩 낀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짜장 국수가 더욱 운치 있게 느껴졌다.(어린 마음에도 그게 운치라고 느껴졌다니 그 풍경을 본 게 얼마나 행운인가.)


장마가 길게 올 때면 할머니가 밭엘 안 가시니 감자랑 옥수수 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았고, 비 내리는 밖을 보면서 직접 만든 식혜를 원 없이 마시는 것도 좋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음식을 맛으로 먹지 않는 것도 시골에서의 여름 방학때문인가 보다고. 함께 먹는 것, 그때 나눈 이야기, 기억하는 혹은 기억하게 될 주변과 우리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시간이었던 것 같다. 맛은 어치피 잊힐 테니까.


그러고 보면 아빠도 목적지까지 가면서 나눈 대화, 갑자기 들른 커피집, 풍경들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고, 엄마는 동지, 추수감사절, 정월대보름 등등 기념일의 음식을 꼭 나눠야 하는 사람이다. 그 소소한 재미 때문에.


이야기의 결론이 이렇게 흐르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크고 작은 인생의 모든 순간에서 그래도 기억할 장면들을 남겼으면 좋겠다는 것.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어떤 자리에 서게 되든 내가 생각하는 가치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작고 작은 생각에 갇혀 볼 수 있는 넓고 따뜻한 것들을 놓치지 말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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