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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르페디엠 Jun 06. 2022

필리핀에서의 꿈같은 나날들

나 홀로 세부 어학 연수기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공부 학원을 다닌 적은 없었는데 참 다양한 것들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수영장에 다녔던 기억이 아주 생생하다. 차가운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해방감, 차오르는 숨, 수업을 끝내고 먹는 떡꼬치의 미친 맛까지...(우리 엄마는 공부하란 말씀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는데 나는 내 인생에서 이게 가장 좋았던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경험 때문일까, 나는 물을 매우 좋아한다. 10년 전쯤 군 전역 직후 필리핀 세부로 2달간 어학연수를 떠났다. 세부에서는 매 주말마다 배치 메이트들과 주변 섬이나 바다로 여행을 다녔는데 필리핀의 바다는 파도가 세지 않고 매우 맑아 놀기에 정말 좋았다. 게다가 20대 또래 형 동생들과 기숙하며 공부하며 지내니 얼마나 재밌겠는가?(나는 영어공부를 좋아한다.) 공놀이도 하고, 수영도 하고 산미구엘도 원 없이 마셨다. 특히 카모테스 섬이 가장 인상 깊었다. 해변에서의 피자와 수많았던 밤하늘의 별... 언젠가 지영이와 다시 한번 꼭 가고 싶다.


내가 다녔던 곳은 세미스파르타식의 어학원이었는데 평일 기준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 정도까지 매일 선생님과 1:1 혹은 그룹 IELTS 수업을 했다. 보통 1달~2달 코스의 과정으로 등록하기 때문에 학원에서는 일정 기간을 주기로 학생들을 모집하는데 동일한 날짜에 입소한 친구들을 batch mate(배치메이트)라고 불렀다. 배치메이트들끼리 동일한 일정으로 수업 스케줄이 정해 지므로, 이들은 세부 라이프의 MVP들이다. 학원에서는 한국 이름을 쓰지 않고 영어 이름으로 서로를 불러서 나는 에드워드로 살았다.(내가 많이 좋아하고 따랐던 제이크 형... 잘 지내지?) 이 또한 묘한 해방감을 줬던 것 같다. 세부에 있는 동안 나는 김태현이 아니고, 에드워드였던 것이다. 세부에서는 뭐랄까, 아는 사람이라곤 티쳐들과 배치메이트밖에 없는 곳에서 매일 하루 종일 붙어 있으니 각자 생긴 대로 좋아할 수 있었던 환경이랄까 싶었다. 나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 나답게 존재할 수 있었고,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도 한 명, 한 명 각자의 빛으로 빛났다. 바다에서 놀 때에는 윗옷을 벗는 습관도 이때 생겼다. 세부의 날씨는 습하고 더워서 수영을 마치고 옷을 입어도 바로 땀으로 젖었기 때문에 바닷가에서는 수영복 바지만 입고 지냈다. 원시 상태의 심리적, 육체적 가벼움과 자연스럽고 편안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배치 메이트 중 여자 동생들과 누나들도 있었지만 가족처럼 자연스레 지내면서도 어색하지 않았던 점도 행복했다. 물놀이를 할 때에는 몸매에 상관없이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수영복을 입는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어서 빨리 정착되었으면 좋겠다. 물가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은 다시 볼 일도 없을 텐데, 시선이 두려워서 불편한 옷을 굳이 걸치고 수영을 하는 것도 비합리적인 것 같다. 더운 날 배를 내놓고 두드리며 길가를 누비는 중국 아저씨들에게도 쿨한 바이브가 있다. 역시 진정한 멋은 태도에서 나온다.


나의 선생님이자 친구였던 티쳐 가비에게 배운 아주 맛있는 망고 고르는 법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정답은 바로! '냄새를 맡아보면' 된다. 맛있는 망고에서는 정말 맛있는 냄새가 난다. 어떤 냄새냐고? 달짝지근하면서도 향긋하고 황홀한 망고 냄새다. 한 번 시도해 보시라. 


나에게는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세부. 푸르고 싱싱한 젊은 날의 추억. 추억을 많이 쌓는 것은 낭만적인 일이다.


세부에서 브리즈번으로 떠나던 날 with 배치메이트
Edward, Jake, Sim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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